“요즘 트렌드? 놓쳐도 괜찮아요…변하는 것 자체가 재미”

남지은 2023. 1. 1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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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쉼톡][쉼톡] 드라마 작가 이희명
드라마 <토마토> <미스터큐(Q) <3인칭 복수>의 이희명 작가.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여기서 잠깐, 쉼톡’은 각자의 삶에서 가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온 대중문화인의 이야기를 담은 기획입니다. 소소하더라도 자신만의 한가지를 가진 이들의 이야기는 듣는 이의 마음을 데웁니다. 타인의 삶을 자신의 잣대로 결론내리지 말자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대중문화인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나의 삶에 스며드는 것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 시작해서 뭐하나.” 2023년이 시작되고 벌써 이 말을 입밖으로 내뱉었다면, 지금 이 사람에 주목하자. 이희명 드라마 작가다. 그가 나른해진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줄지도 모르겠다. 그는 세월을 거꾸로 사는 것 같다. 1994년 데뷔작으로 착한 학교드라마(<공룡선생>)를 썼던 작가는 2022년 ‘19금 학교복수극’(<3인칭 복수>)을 내놨다. 1999년에는 김희선이 주연을 맡은 <토마토> <미스터큐(Q)>로 ‘멜로 잘 쓰는 남자’로 유명세를 탔다.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드라마 문법은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서 그의 행보는 새해를 맞은 지금 이 순간, 여러 생각을 들게 한다.

최근 서울 강남 디즈니플러스 사옥에서 만난 이희명 작가는 예상밖의 말을 했다. 지난해 11월 오티티(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에서 선보인 <3인칭 복수>(디즈니플러스)는 그가 먼저 구상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말이 의외인 이유는 학생들의 문화를 잘 알지 못하면 10대 학원물에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1964년생, 우리 나이로 60살인 그는 이렇게 말했다. “10대들의 용어를 몰라서 대사를 쓸 때 인터넷 검색을 많이 했어요. 제 주변에서 가장 어린 나이가 서른살, 제 딸이었으니까요.(웃음)”

그렇게 나온 <3인칭 복수>는 결과물의 호불호를 떠나 같은 달 선보인 <약한 영웅 클래스1>(웨이브)과 함께 우리나라 ‘19금 학원복수극’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교폭력을 소재로 무책임한 어른들을 꼬집고 아이들이 서로를 지키는 과정으로 희망을 보여줬다. 이 작가는 지난 30년 동안 시대의 흐름에 자신을 맞추며 변화하는 콘텐츠 시장을 이끌어 오고 있었다.

드라마 <토마토> <미스터큐(Q) <3인칭 복수>의 이희명 작가.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김희선 출연한 <토마토> 작가가 <3인칭 복수> 썼다

이희명 작가는 지난 30년 동안 쉼 없이 활동해왔다. 1990년대부터 2020년대 티브이 속에 모두 그의 드라마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남성 드라마 작가가 드물었는데, 그는 특히 ‘멜로 잘 쓰는 작가’로 유명했다. 대표작이 ‘김희선 멜로 3종 세트’라고 불리는 <미스터큐(Q)> <토마토> <요조숙녀>다. <토마토>는 52.7%(닐슨코리아 집계)로 역대 드라마 시청률 19위다. 그런 그가 30년이 지나서 왜 10대의 현실을 고민하게 됐을까. “작가로서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것뿐이에요. 이 작품을 하게 된 계기는 분명 있겠지만, 기억나지는 않아요”라는 말로 슬쩍 넘어갔다.

남은 의아함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면 조금 풀린다. 활동 기간 30년에 견줘 방영작은 많지 않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장르를 바꿔왔기 때문이다. 그는 성공 가도를 달리던 멜로만 고집하지 않았다. <명랑소녀 성공기>로 로맨틱 코미디에서 ‘코미디’ 비중을 높였고, <불량가족> 이후에는 6년 동안 공백기를 가지며 변화를 모색했다. 그는 “이전 작품과 다른 색깔을 하고 싶어서 공백기를 가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타입슬립 사극 로맨스로 열풍을 일으켰던 <옥탑방 왕세자>였다.

<3인칭 복수>도 2017년 <다시 만난 세계> 이후 5년 만에 나왔다. “<다시 만난 세계> 이후 공백은 <옥탑방 왕세자>를 쓸 때처럼 작품 색깔을 바꿔보려고 의도적으로 가진 것이 아니다. 실컷 놀았다”라며 웃고 넘기는데, 변화를 주려고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제가 드라마에서 농담하는 걸 좋아하는데 <3인칭 복수>에서는 그런 설정을 의도적으로 뺐어요. 너스레를 떠는 캐릭터가 한 명도 없어요. 대본쓰면서 농담하고 싶은 걸 참느라 힘들었어요.(웃음)”

그의 작품활동 시작은 코미디 대본이었다. 1990년 학교를 졸업한 그해 <문화방송>(MBC) 코미디 극본 공모에 당선되어 60분짜리 상황극을 썼다. <에스비에스>(SBS)가 생기면서 드라마를 쓰게 됐는데, 첫 작품이 학교드라마 <공룡선생>이다. 데뷔작이 큰 인기를 얻은 이후 멜로드라마로 승승장구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멜로를 하게 됐고 그게 잘 되면서 계속 작업하게 됐어요. ‘내가 멜로를 잘하는구나’ 생각했고, 재미를 느꼈고, 즐겁게 썼어요. 사극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들었는데 잘 몰라서 못 썼어요. 사극을 알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이제는 역사물도 해보고 싶다는데, 수시로 변화를 준 덕분에 그는 어떤 장르든 뚝딱 해낼 것 같다.

30년 비결? 변하는 게 재미있으니까

아날로그 시대에서 오티티 시대를 모두 거치면서 도태되지 않은 것이 ‘이희명 작가’의 경쟁력이다. 그는 “(데뷔한 지 오래돼서인지) 드라마를 쓰면서 ‘올드하지 않나’라는 말을 들을까 봐 괜히 신경이 쓰인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수시로 시대의 흐름을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재미있는 것은 늘 찾아 읽는다고 했다. “기발한 댓글이나 에스엔에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재미있고 화제가 된 글은 꾸준히 봐요. 뒤처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단지 세상이 변하는 게 재미있어서 늘 읽어요.”

사람들의 가치관, 태도 등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결과물은 인터넷 등에서 여러 방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결과물을 과거와 비교해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뉴스를 챙겨보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두는 것은 기본, 세월이 흐를수록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입담’이 좋아지는 것은 시사 토크쇼로 익히고 있었다. “제가 말을 잘 못 해요. 그래서 시사 토크쇼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말하는 방식을 배워요. 말을 주고받고, 어느 부분에서 말을 자르는지 눈여겨봐요. 대부분 말 잘하는 사람들이 나오니까요. 그런 모습을 캐릭터에 대입시켜요.”

때론 음악의 힘을 빌려 ‘변화’를 추구한다. 대본을 쓸 때는 그 내용에 맞는 곡을 찾아 반복해서 듣는다. “나름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서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3인칭 복수>를 작업할 때는 시아의 ‘스노우맨’을 들었다. “대본을 쓰려면 나한테서 벗어나서 어떤 차원으로 올라가야 하는 게 있어요. 그럴 때 그 장면의 분위기와 맞는 곡을 들으면 도움이 되더라고요.”

승승장구해왔던 그도 실패한 경험이 있다. <팝콘>이란 작품이다. “제가 좋아하는 농담도 없이 슬프기만 한 드라마였어요. 그때 알았어요. ‘아 난 완전히 슬픈 건 안 되는구나.’” 하지만 그는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난 이런 건 못하는구나’ 생각하고 넘긴다”고 했다. 실패를 장단점을 아는 기회로 삼는 것도 그가 30년간 작가로 살아온 경쟁력이다.

30년? 드라마로 시대 변화 느껴

30년간 작업을 이어온 덕분에 그의 작품만 훑어도 달라진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1994년 데뷔작 <공룡선생>(에스비에스)과 2022년 작품 <3인칭 복수>는 모두 ‘학원물’이다. “<3인칭 복수>를 작업하면서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요. 정말 세상이 변했구나. 과거 학교드라마는 선생님 중심이었어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선생님이었고. 요즘은 선생님이 거의 안 보이죠. 문제가 생겨도 아이들은 선생님을 찾지 않아요. 지금은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죠.”

달라진 여성의 위상도 그의 작품이 말해준다. “예전 같으면 위험이나 어려움에 처한 여자 주인공을 드라마 속 직장 상사인 실장님이나 본부장님이 구해주는데, 요즘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스스로 일어서죠.” 그는 <토마토>나 <미스터큐> 처럼 여자 주인공 두 명의 대립이 분명했던 과거 멜로드라마에서는 ‘악역’에 해당하는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게 가장 재미있었다고 한다. 색깔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드라마에서 질투심에 선한 주인공을 괴롭히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올드하다고 외면당하겠죠(웃음)”

가장 크게 변한 건 작가의 위상이다. 케이(K) 콘텐츠가 세계의 중심이 되면서 업계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이제는 미국드라마 시스템처럼 한국도 집단 창작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희명 작가도 작가 4명과 함께 작가 사무실을 차렸다. 오티티 시대에 맞춰 집단 창작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다. “한명이 메인인 작품에 다른 4명이 보조작가처럼 참여해 에피소드도 이야기하고 장면도 함께 만들며 일종의 품앗이를 한다고 보면 돼요. 요즘은 사전제작제로 가니까 작가들이 작품 하나를 하는 데 3년이 걸리기도 해요. 대본이 나오는 시간도 당기면서 품질도 좋아지니까.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그는 올해 계획을 묻자 “일하는 게 재미있다”며 “앞으로 일을 더 많이 하고 싶다”고 했다. “힘든 건 마감 때문인데, 그건 모든 작가가 다 똑같잖아요. 그것 외에는 재미있어요. 잘 쓰든 못 쓰든 완결이 지어지지 않습니까. 시작이 있어서 끝이 있는 게 재미있어요.” 그 재미있는 작업을 오랫동안 하기 위해 그는 또 한 번 시대의 변화에 자신을 맞출 다짐을 하고 있다. 과거 작품이 잊히지 않고 유튜브 등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게 반갑지 않으냐고 물으니 그다운 답이 돌아왔다.

“그게 가볍게 볼 게 아니더라고요. 예전에는 지나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다 있잖아요. 책꽂이에서 책 꺼내듯이 보고 또 보고 하니까.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보고 또 봐도 부끄럽지 않도록.” 데뷔 40년, 50년이 흘러도 그는 예상 밖 장르의 작품을 쓰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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