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냉장창고의 적막함, 그 공백 그대로 제주를 담다
언뜻 보면 카페와 갤러리가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이라 생각지 못할 수 있다. 제주 북동쪽 구좌읍 동복리 해안가를 따라가다 보면 콘크리트 날것 그대로인 듯 회색빛의 네모반듯한 건물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탁 트인 풍경이 마치 하늘, 그리고 바다와 맞닿아 있는 느낌을 준다. 비움의 미학으로 제주 본연의 풍경을 담았다. 최무규 대표가 이끄는 건축사사무소 에스에프랩(SF LAB)이 설계한 ‘카페 공백’이 그 주인공이다.
방치된 냉동창고를 비움의 감동공간으로
2017년부터 약 3년간의 건축 과정을 거쳐 완성된 카페 공백은 오랜 기간 방치돼 있던 냉동 창고를 리모델링하고, 신축 건물을 지어 완성된 곳이다. 냉동 창고 두 동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습을 통해 느낀 ‘폐허의 적막함’에 매료된 최 대표는 카페 공백이 공간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
최 대표는 “3년간 작업을 했기 때문에 애착이 큰 곳”이라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되도록이면 비우고, 제주도 풍경을 가지고 들어오자, 완성된 상태로 끝내지 말자고 하는 모두의 공감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비워내는 데 초점을 맞춘 카페 공백은 설계 의도대로 여백의 미가 돋보인다. 넓은 부지에 자리한 카페 공백 건물들의 실내 설계 역시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많이 덜어내고 간격을 넓혀 바쁜 일상을 잊고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한다. 건물 내부 곳곳에 거울을 설치해 방문객이 자신을 비춰보며 배경과 함께 스스로를 의미 짓는 경험을 할 수 있게끔 의도했다.
카페 공백은 초반에는 건축물 그 자체보다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슈가의 형이 운영하는 카페로 유명세를 얻기도 했지만, ‘2020 한국건축대상’ 신진건축사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건축적 우수성을 인정받은 곳이기도 하다. 한때 BTS 팬클럽 아미(ARMY)의 ‘방탄투어’ 성지로도 꼽혔지만 현재는 카페 운영 주체가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한땐 BTS성지로 꼽혔던 2020 건축대상 명소
최 대표는 “공백 프로젝트는 어려운 과제였기도 했고 그걸 해나간 과정에서의 순수함도 있었다”며 “건축사 자격을 취득했다고 해서 다 충족된 상태가 아니고 어떤 경험을 하면서 어떤 커리어를 만들어나가야 하냐는 성장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공백은 제게 그런 건축물”이라고 했다.
최 대표가 제주에서 선보인 대표작은 카페 공백 외에도 ‘하례리 창고’가 있다. 카페 공백과 마찬가지로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에 띄는 이 건축물은 서귀포시 남원읍 사유지에 지은 근린생활시설 용도 창고다. 그는 “공백이 끝나고 2019년 시작한 프로젝트”라며 “가끔씩 가서 보게 되는 멋진 장소”라고 말했다.
카페 공백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제주와 연이 처음 닿은 최 대표는 현재 제주에서 6개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그는 “건축가로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제주도라는 장소를 만나 프로젝트들을 경험해보는 중요한 시기라는 걸 깨달았다”며 “저도 도시에서 자랐고 프랑스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심상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그런 부분들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제주를 5년 동안 왔다갔다 하면서 깨달은 건 육지에서 내려온 사람의 관점으로 볼 것인지 , 로컬 중심으로 볼 건지 이 차이가 매우 크다”며 “건축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굉장히 수도권 중심적인 사고를 하면서 지방을 바라보는 점이 있다. 이 차이를 자각하면서 인식의 출발점이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최 대표가 제주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은 시간을 길게 두고 충분히 고민해 완성해낼 수 있는 것들 위주다. 그는 “급하게 해야 되는 프로젝트들은 안 하려고 한다”며 “제주도까지 내려가서 하는 프로젝트는 제주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어야한다. 그게 아니라면 황소개구리 같은 것이다. 지역의 생태계들이 있는데 각광받았다고 해서 이곳저곳 프로젝트들을 하고 다니는 건 맞지 않다”고 했다.
‘하례리 창고’ 외 제주서 6개 프로젝트 진행중
그가 프로젝트를 맡을 때 ‘로컬 관점’만큼 중요시 여기는 건 ‘영감은 장소와 건축주로부터만 받는다’는 점이다. 최 대표는 “장소가 다르고 고객이 다르면 프로젝트가 달라진다”며 “이 두 개를 동시에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그 간극을 극복해가는 과정도 하나의 서사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건축주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지는 게임이라는 생각을 한다”며 “예를 들어 ‘왜 이 사람은 방이 세 개가 필요하다는 건가’ 이런 식으로 그 안에 들어가서 요구조건을 디자인하는 의지와 틈을 포착하는 능력이 설계자에게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결국 이 프로젝트를 건축주를 감동시키는, 만족시킬 수 있도록 끌고 갈 수 있냐는 지점에서 차이가 있다”며 “그 과정에서 세심한 배려가 묻어나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4년 건축사사무소 에스에프랩을 개소해 올해로 10년차를 맞은 최 대표는 ‘기술·디자인·공예가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하나가 되는 건축을 만들어간다’는 비전을 갖고 나아가고 있다.
로컬 관점으로 보면 건축 인식 출발점 달라져
실제로 그는 건축과정에서 직접 타일 1500장을 만들고, 벤치를 제작해 배치하는 등 공예와 건축을 융합하는 시도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최 대표는 “공예는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다. ‘다음 번에는 더 나아지겠지’ 하며 계속 시도하는 것 뿐”이라며 “공예를 어떻게 건축스케일까지 연장할 수 있을지 제 프로젝트에서 시도해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무소에서 압구정에 위치한 ‘뱅가’라는 와인바 리모델링 작업도 1년 넘게 진행 중인데 이 공간에 공예적 요소들이 많이 담겨있다”며 “저희에게는 큰 이정표가 될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이러한 건축적 가치관과 철학들을 건축물에 반영하기 위해 건축사사무소는 여타 사무소들과 달리 ‘주어진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무소’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있다.
그는 “건축주의 요구조건 속에 들어가 욕망의 구조를 이해하고 새롭게 만들어내야 한다. 여기에 쓰는 시간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며 “저희처럼 과정을 길게 가져가는 사무소의 경우에는 하루하루가 의미가 있어야 한다. 모든 과정이 끝난 뒤 이렇게 고민하고 쓴 시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어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과는 보잘 것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의 시간을 늘리려 하고 건축주와 더 가깝게 부딪혀 소통을 이어가는 이유는 이게 제 인생이기 때문”이라며 “직업이라고 하는 범주 안에 포함되지 않는 개념이다. 이 과정이 제게는 ‘사는 것’ 그 자체”라고 했다.
신혜원 기자
hwshi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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