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정보석, 두 배우가 색칠하는 ‘삶이라는 무대’···연극 ‘레드’
유동근 30여년 만의 연극 복귀작
유동근 “첫아이 같은 연극”, 정보석 “짝사랑” 레드>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동굴 같은 작업실. 무대엔 물감과 붓이 담긴 양동이와 거대한 캔버스가 즐비하다. 부루퉁한 표정의 중년 화가는 다짜고짜 앤디 워홀을 욕하기 시작한다.
“너 정말 앤디 워홀이 백년 뒤 미술관에 걸릴 거라고 생각해?” 이어지는 젊은 조수의 답은, “지금 걸려 있는데요?”
그건 돈이 되면 뭐든 하는 “빌어먹을 갤러리들”의 비즈니스지 예술이 아니라는 나이 든 화가의 성토에, 젊은 조수는 기어코 말을 덧붙인다. “사람들에게 예술이 어때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 지겹지 않으세요?”
연극 무대가 담고 있는 시기는 1958년에서 1959년 사이 어딘가이다. 중년 화가는 195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다. 1970년 자신의 작업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20여년간 남긴 색면 추상화로 현대미술사에 각인된 인물이다.
지난달 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 <레드>(김태훈 연출)는 실존 인물인 로스코와 가상의 조수 ‘켄’의 대화를 무대 위로 불러온다. 1958년 로스코가 의뢰받은 뉴욕 시그램 빌딩 벽화에 얽힌 실화를 다룬다. 로스코는 거액을 받고 이 빌딩의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에 걸릴 연작 40여점을 완성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돌연 계약을 파기하고 돈을 돌려준다.
연극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중년의 유명 화가와 그가 조수로 고용한 젊은 무명 화가의 대화를 통해 예술과 세대, 삶에 대한 논쟁을 펼쳐낸다. 피카소의 입체파를 몰아낸 로스코의 추상표현주의가 앤디 워홀의 팝아트에 밀려나듯, 옛것이 새것에 정복당하는 세상의 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쌓은 채 새로운 흐름을 거부하는 로스코, 그의 편협함을 당돌하게 꼬집는 켄은 각각 구세대와 신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켄은 예술의 상업화를 맹렬히 비판해온 로스코가 부자들이 드나드는 고급 레스토랑 벽화 작업에 응한 것에 의문을 품고, 로스코의 작품세계에 대해 거침없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에비에이터> <스타 트랙 : 네메시스> <라스트 사무라이> 등의 시나리오 작가로도 유명한 존 로건이 쓴 희곡이다. 200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후 이듬해 미국 브로드웨이로 건너가 2010년 토니어워즈 연극 부문 최우수작품상, 연출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했다. 국내에선 2011년 처음 무대에 올랐다.
두 인물의 맹렬한 토론과 팽팽한 긴장감이 주가 된 2인극인 만큼, 배우들의 밀고 당기는 쫀쫀한 연기 호흡을 관람하는 재미가 있다. 자의식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로스코는 배우 유동근(66)과 정보석(61)이 번갈아 연기한다.
정보석이 2015년과 2019년에 이어 이번에 세 번째 로스코로 분했다면, 유동근은 연극 무대 자체가 30여년 만이다. 연기 경력 42년의 유동근은 1980년대 민중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해 엘칸토소극장에서 배우로서 성장 발판을 다졌다. 이후 긴 세월 TV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동해오며 선 굵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만큼 오랜만의 무대 복귀라 다른 배우들보다 3주 먼저 연습을 시작했다고 한다.
유동근은 지난달 프레스콜에서 “너무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만큼 사실 모든 게 첫 경험”이라며 “이번 연극은 어쩌면 제게 첫아이의 탄생과 같다”고 말했다. 출연 계기는 다름 아닌 정보석의 공연이었다고 한다. 그는 “2019년 정보석씨가 공연한 <레드>를 봤는데 너무 멋있었다. 로스코란 인물의 매력에 흠뻑 취했다”며 “대본을 구해 읽었는데 강한 동기부여가 됐다”고 했다.
유동근에게 이 작품이 “첫아이”라면, 정보석에겐 “짝사랑”이다. 정보석은 “못 이룬 사랑이 아쉬워서 다시 하는데 또 후회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 매번 하겠다고 한 그날부터 후회하기 시작해요. 헤어져 있으면 하고 싶은데, 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골머리가 아프죠. 좋은 건 하나 있어요. 배우로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깨우치게 하고 자극하는 작품입니다.”
정보석은 여러 차례 도전하게 하는 이 작품의 매력으로 “예술을 소재로 인생을 이야기하는 점”을 꼽았다. “우리는 살면서 내 진리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죠. 과거를 통해 새로운 걸 만들어냈다면 나 역시 과거가 될 거라는 각오가 서야 하는데, 이를 망각한다는 것을 이 연극은 보여줍니다.” 유동근은 “이 작품은 대본 자체가 하나의 고전 미술사 같다”며 “제겐 큰 산맥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같은 배역을 연기하지만 색깔은 다르다. 유동근의 로스코는 거칠지만 인간적이다. 유동근은 “정보석 배우의 멋진 연기가 부럽기도 했지만 나만의 해석, 좀 더 인간적인 로스코로 다가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보석이 연기하는 로스코는 날카롭고 냉철하다. “치밀하고 치열한, 빈틈없는 인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조금의 허점도 용납하지 않는, 자신의 삶에 철저한 예술가 말이죠.”
로스코에게 도발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조수 켄은 배우 강승호·연준석이 번갈아 연기한다. 무대 위에서 물감을 섞고, 춤추듯 거대한 캔버스에 밑칠을 하고, 또 쉴 새 없이 논쟁하며 두 선배 베테랑 배우와 100분간 호흡을 맞춘다. 공연은 2월19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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