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 뚫은 여성 감독의 첫 대작, 임순례 감독의 ‘교섭’ [플랫]
2007년 7월19일 아프가니스탄에 간 샘물교회 목사 등 23명이 탈레반에게 피랍됐다. 아프간 정부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탈레반은 납치 7일째인 25일 배형규 목사를 살해했다고 발표했다. 6일 뒤에는 심성민씨를 추가로 살해했다. 미국과 아프간 정부는 테러세력에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한국 정부는 국가정보원 등을 통해 직접 협상에 나섰다. 사건은 42일 만에 종료됐고, 교인 21명은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영화 <교섭>은 이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교섭을 위해 현지에 파견된 외교관 정재호(황정민)와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맡고 있는 국정원 요원 박대식(현빈)이 교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을 그렸다. 영화를 만든 임순례 감독을 1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임 감독은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목적 의식은 같지만 일하는 스타일은 완전히 다른 두 공무원이 처음에는 다른 출발을 하지만 어떤 사건들을 계기로 인질들을 함께 구해낸다는 큰 줄기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모래가 가득한 계곡, 낯선 모양의 기암절벽, 사막 등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광활하고 이국적인 풍경이 영화에 재미를 더한다.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문 대식의 대사대로 “하늘과 땅 사이 나밖에 없다”고 느껴지는 풍경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팬데믹 초기, 제작진은 입국 자체가 불가능한 아프가니스탄 대신 비슷한 풍광을 가졌으면서도 안전한 요르단으로 향했다. 임 감독은 “한국과 완전히 다른 풍경들이 영화에서 잘 표현됐다”며 “가장 힘들었던 건 더위다.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차의 트렁크에 스태프들이 구겨 앉아서 촬영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요르단과 아프가니스탄은 풍경은 비슷해도 언어는 다르다. 이슬람과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철저히 사전 조사한 임 감독은 아랍어로 된 요르단의 간판들을 실제로 갈아끼우거나 컴퓨터그래픽(CG)을 사용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쓰는 파슈토어로 바꿨다.
무장단체와의 협상을 다루는 만큼 액션이 주를 이룰 것 같지만 영화는 피랍 사건을 풀어가는 인물들의 심리와 교섭 과정에 좀 더 집중한다. 임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죽이고, 탈레반하고 총 싸움하는 영화가 아니다. 결국 드라마로 풀어가는 영화”라고 했다. 서사의 긴장감은 재호가 직접 탈레반 주둔지인 동굴로 가 탈레반 간부와 교섭을 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임 감독은 “영화 준비 단계부터 동굴 협상 장면이 잘 나오냐, 안 나오냐에 영화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큰 액션 없이 한국 외교관과 탈레반이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한다”며 “재호 역할에는 테이블에서의 연기가 중요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에너지를 견인할 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황정민 배우가 제안을 흔쾌히 받아줬고, 연기도 훌륭히 해냈다”고 밝혔다.
황정민과 임 감독은 2001년 개봉한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22년 만에 다시 만났다. 임 감독은 오랜만에 작업한 소감에 대해 “20년 전 설날에 봤던 먼 친척 조카가 20년 뒤 서울대 박사과정 다니고 있는데 만난 느낌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때는 황정민이 영화를 사실상 처음 찍는 상황이었다. 그땐 마냥 신나고 재밌었다면 이제는 주연 배우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집중력, 열정 있게 임하는 점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피랍 사건 당시 인질들은 대중으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았다. 여행제한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무리하게 선교활동을 갔다가 일어난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영화는 이들의 행동을 평가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 임 감독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진 생각은 있지만 영화를 통해 샘물교회 교인들의 잘잘못을 가리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며 “당시의 대중 정서 등이 대사에 반영돼 있기는 하지만 특정 대사나 상황이 제 생각이라고 뚜렷하게 얘기하기는 어렵다. 영화에서 주관적인 생각을 밝히고 끌고 가는 것도 연출의 한 기법이지만, 저는 제 생각을 두드러지게 얘기하기보다는 양쪽을 다 볼 수 있게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관객들이 영화만 보고도 판단해보시기도 하고, 또 실제 사건을 찾아보시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길 바란다”며 “내가 가진 신념이 절대적으로 옳은가, 과연 국가의 기능과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어떤 것이며 공무원들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이런 것들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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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가 주목받는 이때, 중견 여성 감독이 남성들만 등장하는 영화를 만든 게 의외라는 반응도 있다. 임 감독은 “여성 감독이니까 여성이 주인공, 남성 감독이니까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다. 관심 있는 주제나 소재에 따라 남성이 적합할 때가 있고, 여성이 적합할 때가 있다”고 했다. 다만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활동과 관련해서 “결국은 성평등한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영화계를 보면 독립영화계나 대학 영화과에는 여성들이 훨씬 많고,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듭니다. 여성은 재능이 뛰어나지만 산업으로 들어오는 비율은 너무 적습니다. 제작자들이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작품은 여성 감독에게 잘 안 맡기려 하거든요. 이런 성차별적 현상, 유리천장과 편견을 없애는 게 든든의 역할입니다.”
18일 개봉하는 <교섭>은 순제작비 140억원가량이 투자된 영화로, 임 감독은 여성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제작비 100억원대 영화 연출을 맡았다.
▼ 오경민 기자 5km@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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