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과 경쟁하는 러시아 용병조직…와그너 그룹이 뭐길래
고도의 전투 기술을 갖춘 민간군사기업(PMC)인 줄 알았던 와그너 그룹의 용병은 왜 목숨 걸고 부대를 탈출해 노르웨이에 망명을 신청했을까.
의문은 또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휘하는 러시아의 통합사령관이 3개월만에 전격 교체되자 왜 와그너 그룹과 러시아군 사이의 알력 다툼이 본격화 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까. 두 조직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하는 아군 관계가 아닌가. 무엇보다 일개 민간군사기업이 국가의 군조직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는게 가능한 일인가.
오랫동안 ‘푸틴의 그림자’로 불렸던 와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수면 위로 부상했지만 여전히 상당 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하지만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알려지지 않았던 와그너 그룹의 실체를 조금씩 세상에 드러내고 있다.
알고보니 죄수들로 구성된 ‘노예 부대’
“죄수들은 마치 고기처럼 대포의 총알받이가 됐다. 나는 죄수 그룹을 이끌었고, 우리 소대 30명 중 3명만 살아남았다.”
우크라이나 동부 격전지 바흐무트에서 탈출해 노르웨이에 망명을 신청한 와그너 그룹의 용병 안드레이 메드베데프(26)는 지난 17일(현지시간) 전장의 실상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전투를 거부한 용병들은 잔인하게 처형 당했으며, 그 역시 계약 연장에 응하지 않으면 보복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전장에서 탈출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미 정보당국은 우크라이나전에 투입된 와그너 용병의 수가 5만여명에 달하며 그 중 4만여명이 교도소에서 모집한 재소자라고 보고 있다. 와그너는 전국의 교도소를 돌며 러시아 사병보다 두 배 이상 높은 24만루블(약 517만원)의 월급, 6개월 복무하면 사면해준다는 대가를 제시했다. 러시아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약속이다.
이렇게 모집된 용병들은 최전방에 투입됐다. 미국의 국방전문매체 디펜스원은 바흐무트 전투에서 와그너 그룹이 공을 세우긴 했지만 사상자 측면에선 큰 대가를 치렀으며, 사상자의 90%를 재소자로 보고 있다는 백악관 고위 관계자의 말을 보도했다. 결국 와그너의 경쟁력은 용병들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는 잔인함에서 기인하는 셈이다.
와그너는 머릿수를 늘리기 위해 러시아 바깥에서까지 공격적인 모집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17일 러시아와 와그너 그룹을 향해 자국민을 대상으로 용병을 모집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키르기스스탄 언론들도 와그너가 월급 24만루블과 러시아 시민권 획득을 조건으로 걸며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서 신병을 모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림자 부대’에서 푸틴의 오른팔로
와그너 그룹은 크렘린의 국빈 만찬 등에 케이터링을 제공해 ‘푸틴의 요리사’로 불리는 기업인 예브게니 프리고진과 체첸전쟁의 군 지휘관 출신인 드미트리 우트킨이 창설한 조직이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름반도를 강제로 병합할 때 전쟁에 투입돼 세상에 처음 존재가 드러났다. 이후 시리아와 리비아, 모잠비크, 수단 등의 내전에 개입해 친러시아 세력에 힘을 실으며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등 각종 전쟁범죄로도 악명을 떨쳤다.
크렘린은 그동안 이들과의 관련성을 부인해 왔다. 민간 군사기업은 러시아에서 불법이다. 이 때문에 와그너는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유령’ 기업에 가까웠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해 ‘30만명 부분 동원령’을 내렸음에도 전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푸틴 입장에서 와그너 그룹은 유용한 존재였다. 빠른 전력 보강은 물론 이들은 정식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사상자 집계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이 전쟁 범죄를 저질러도 책임을 부인할 수 있다.
와그너는 지난해 1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고층 빌딩에 공식 본부를 개설했다. 러시아 곳곳엔 ‘오케스트라 바그너가 당신을 기다립니다’라고 쓰인 대형 광고판이 내걸렸다. 여기서 ‘오케스트라’란 와그너(Wagner) 그룹을 지칭하는 말로, 이 이름은 히틀러가 좋아한 음악가 바그너에서 따왔다고 알려져 있다. 와그너 그룹을 창설한 우프킨은 히틀러를 숭배해 바그너의 이름을 호출 부호로 썼다고 한다.
이제껏 와그너 그룹과의 관련성을 부인해오던 프리고진도 지난해 9월 자신이 이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지난해 11월에는 크렘린의 주요 선전매체 중 하나인 RT가 ‘와그너 : 조국과의 계약’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홍보하기도 했다.
일개 용병조직이 러시아 정부군과 경쟁…푸틴의 군부 견제용이란 분석도
서방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전에서 고전하면서 크렘린의 와그너 그룹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고, 이에 따라 프리고진의 러시아 내 영향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지난달 브리핑에서 “와그너 그룹의 높아진 위상으로 러시아 장교들이 이들의 명령을 받는 경우도 있다”며 “이들이 러시아 군 및 다른 세력과 경쟁하는 권력으로 부상했다”고 말했다.
실제 프리고진은 군 경력이 전무하면서도 대놓고 러시아군 지휘부의 무능을 공격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군이 도네츠크 리만을 우크라이나군에 뺏기자 군 최고 사령관의 지휘 실패를 거론하며 “이 XX들을 발가벗겨 기관총을 들려 최전방에 세워야 한다”고 맹비난한 바 있다. 바흐무트 인근 솔레다르에서의 전공을 두고서도 연일 와그너와 국방부 간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미 해군분석센터(CNA)의 러시아 연구책임자 마이클 코프먼은 “프리고진은 이 기회를 통해 러시아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이 얼마나 무능한지 드러내려고 한다”며 “후자가 사실이라는 이점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크렘린이 진화에 나섰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6일 “(와그너와 군 사이) 갈등은 오로지 정보 공간에서만 존재한다”며 “러시아는 우리의 영웅을 알고 있다. 양쪽 모두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에서는 누구도 믿지 않는 푸틴 대통령이 군부를 견제하기 위해 와그너 그룹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 군사 전문가 파벨 루진은 “와그너는 정예부대도 아니고 잘 훈련된 특공대원도 아니다. 그들은 (군의 정치적 세력화로 인한) 위험을 상쇄하기 위해 이용되는 또 다른 종류의 총알받이일 뿐”이라고 알자지라에 말했다.
와그너 그룹과 군부 모두 푸틴의 필요에 따라 교체되거나 상호 경쟁하는 존재들이란 것이다. 실제 최근 프리고진과 가까운 관계인 세르게이 수로비킨 우크라이나전 총사령관이 3개월 만에 경질된 것은 거꾸로 급속히 영향력이 커진 와그너 그룹을 견제하려는 차원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와그너 그룹 외에도 푸틴 대통령의 전 경호원이 이끌고 있는 러시아 국가방위군, 람잔 카디로프가 이끄는 체첸군 등 여러 세력이 우크라이나전에서 러시아 정부군과 ‘제한적 협력’을 하고 있다면서 “통일된 사령부도, 지휘와 행동에 대한 통일된 계획도 없다”는 러시아군 전직 장교의 말을 전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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