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127조 원 배상” 도쿄전력 전 경영진, 형사에선 또 ‘무죄’

박원기 2023. 1. 1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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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2시 도쿄고등재판소(고등법원) 법정에 도쿄전력 전 임원 2명이 나란히 섰습니다. 다케쿠로 이치로(76살) 전 부사장과 무토 사에(72살) 전 부사장으로, 함께 재판을 받고 있는 가쓰마타 쓰네히사(83살) 전 회장은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도쿄전력은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당시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원전의 운영사로, 도쿄전력의 핵심 경영인이었던 세 사람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수년 째 재판을 받아 왔습니다.

당시 제1원전에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드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는데도 경영진이 제대로 대응하지 않아 인근 '후타바 병원' 입원 환자 40여 명을 숨지게 했다는 혐의였는데요. 2019년 9월 도쿄지법 1심 선고에 이어 이날 열린 2심에서도 이들에겐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당시, 원전 운영사인 도쿄전력의 경영진이었던 가쓰마타 쓰네히사(83살) 전 회장, 다케쿠로 이치로(76살) 전 부사장, 무토 사카에(72살) 전 부사장 화면: NHK방송 갈무리


■ 1심 이어 2심도 '무죄'

이번에도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①거대한 지진해일이 발생할 것을 예견할 수 있었나 ②대책을 마련했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는가'였는데요.

앞서 2002년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바다를 포함해 규모 8.2 전후의 쓰나미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내용의 <장기 평가> 예측을 발표했는데, 이런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원전 주변에 높이 10미터가 넘는 방파제를 세우거나 시설 침수를 막을 대책을 세울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게 기소 내용의 핵심이었습니다.

이에 경영진 측은 <장기 평가>는 과학적 신뢰성이 없고 막연한 이유로 원전 운전을 정지할 의무가 없었다면서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1심에 이어 2심 재판부 역시 <장기 평가>에 대해 "10미터가 넘는 쓰나미가 덮칠 현실적인 가능성을 인식하게 하는 정보는 아니었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 민사에선 '127조 원 배상'

하지만 이번 재판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불과 6개월 전에 있었던 민사 재판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도쿄전력 주주 48명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회사가 큰 손해를 봤다면서 가쓰마타, 다케쿠로, 무토를 포함한 경영진 4명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는데요. 2022년 7월 1심 재판부는 약 13조 3천억 엔(약 127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배상금 지급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주주들이 근거로 내세운 것도 <장기 평가>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도쿄전력이 2008년 계산한 쓰나미 예측치(최대 높이 15.7미터)가 합리적이고 신뢰할 만한 내용이었는데도, 경영진이 대책을 게을리해 관리자로서 주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주들은 주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쓰마타 전 회장 등은 당시에도 "<장기 평가>의 신뢰성이 낮고 쓰나미 피해 예측이 어려웠다. 설사 예측이 가능했어도 대책을 세울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아, 가쓰마타 등은 형사 1심에선 승소하고도 민사에선 패소했습니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당시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원전


■ 형사 책임 묻기까지 '험난한 과정'

후쿠시마 주민들이 도쿄전력 옛 경영진을 상대로 형사 책임을 묻는 과정은 길고 험난했습니다. 원전 사고 발생 1년여 뒤인 2012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소 고발에 무려 14,000여 명이 참여했지만 도쿄지검은 2013년 9월 전원 불기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거대한 쓰나미로 경영진에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015년 7월 검찰심사회가 나섰습니다. 검찰심사회 제도는 일본의 사법개혁 차원에서 2009년 도입됐는데, 검찰이 비록 불기소했더라도 시민 11명으로 구성된 검찰심사회가 '기소해야 한다'고 의결하면 강제 기소 처분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검찰심사회의 강제 기소로 2017년 6월 도쿄지법에서 첫 공판이 열렸지만, 2년여 심리 끝에 2019년 9월 1심 재판부는 3명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렸습니다.

민사에서 경영진의 책임을 인정했는데 형사에선 다른 결과가 나온 데 대해 일본 언론들은 민형사 재판의 증거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민사소송은 원고와 피고 양측의 주장을 바탕으로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지만, 형벌을 부과할지 말지를 판단하는 형사 재판은 민사 재판보다 더 엄격한 입증을 요구하기 때문이란 겁니다.

일본 시민들이 18일 오후 도쿄고등법원 인근에서 도쿄전력 옛 임원에 대한 2심 무죄 판결에 항의해 '전원 무죄, 부당 판결'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시위하고 있다.


유족 "지옥에 두 번 내려앉은 기분"

2심 무죄 선고 직후, 법원 주변에선 "전원 무죄 부당 판결"이라고 쓴 종이가 내걸렸고 곳곳에서 원전 사고 피해 유족들의 분노와 낙담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원전 사고 후 아버지를 잃은 간노 마사카쓰 씨는 NHK방송에 "2심 판결은 다소 기대했는데 분노와 허무함만 남게 됐다"며 괴로운 심정을 밝혔습니다.

그는 "이번 결과로 두 번이나 지옥에 내려앉은 기분이다. 시민들의 생각과 동떨어진 판결로 경영진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이를 잊지 말아달라"고 말했습니다.

역시 남편을 잃은 미쓰코 씨는 후쿠시마현 자택에서 TV로 2심 결과를 지켜본 뒤 "(경영진) 3명에겐 뭔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한테 뭔가를 받고 싶은 건 아닌데 (희생자를 위한) 향이라도 피우러 와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도쿄전력은 이번 판결 후 "원전 사고로 후쿠시마 주민을 비롯한 여러분께 큰 불편과 심려를 끼친 데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 말씀을 드린다"면서도 전 경영진 3명의 형사 소송에 대해선 말을 아꼈습니다.
https://news.kbs.co.kr/special/danuri/2022/intro.html

박원기 기자 (remembe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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