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덕의 귀농연습] ‘존디어 트랙터’를 가능케 한 질문들

이재덕 기자 2023. 1. 1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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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현지시간) 세계 최대 전자박람회인 ‘CES 2023’이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4m 높이의 거대한 트랙터가 전시돼 있었다. 농기계회사 존디어가 개발한 완전자율주행 트랙터다. 운전석에 탈 필요 없이 스마트폰 조작만으로 이 트랙터가 광활한 평원을 다니며 쉬지 않고 밭을 갈게 할 수 있다. 그 위에 씨앗을 심고 적당량의 비료액도 뿌려준다.

이재덕 산업부 기자

비전카메라가 달린 제초장비를 설치하면 이동 중에 잡초만 포착해 그 위에만 제초제를 살포한다. 밀밭이나 옥수수밭을 달려도 거대한 바퀴가 작물을 깔아뭉개는 일이 없다. 고성능 GPS 장치가 있어 오차가 2.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토양·기후 데이터 등을 모아 사이버상에 똑같은 밭을 만드는 ‘디지털 트윈’ 기술을 적용해 어떤 작물이 적합한지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그 결과를 농가에 알려준다.

최첨단 스마트 공장에서나 적용할 법한 첨단 장치들이 농기계에 장착됐다는 사실에 관람객들이 트랙터 내부를 구경하겠다며 줄을 섰다. 농기계업체 최초로 기조연설을 한 존디어의 존 메이 최고경영자(CEO)는 이번 CES의 최고 스타였다.

놀라운 기계이지만 대규모 밭을 가진 미국 대농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장비다. 논농사가 많고 작은 규모의 경작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국내에 들이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트랙터 자체보다 놀라웠던 건 존디어가 그들의 고객인 농부들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존 메이 CEO의 기조연설 때 가장 앞자리에는 협력사 CEO도, 정부 관계자도 아닌 존디어의 고객인 농민들이 앉아 있었다. “미국 인구의 2%밖에 안 되는 농민들에게 왜 신경 써야 하냐고요? 우리 모두가 필요한 식량, 연료, 섬유를 만드는 대단한 일을 하는 분들이거든요.”

필요한 건 농민 고민 풀어줄 기술

그에 따르면 미국의 농지는 줄고 일할 사람은 부족하다. 지구온난화로 기후는 변덕스러워졌고 농산물 가격은 출렁거린다. 존디어가 농기계에 첨단 장비를 도입한 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농부들은 어떤 고민을 하는지, 그들의 고민거리 해결에 어떤 첨단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지, 농부들이 첨단기술에 쉽게 접근하려면 조작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적정 비용은 어느 정도인지 등이 고려됐다. 그는 “기술은 존디어 DNA의 핵심이지만 우리는 기술을 위한 기술을 만들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번 CES는 분명 이전과 달랐다. 지난해에는 인공지능 휴머로이드 로봇이나 우주 기술 등 먼 미래에 쓰일 기술이 주목받았지만, 이번에는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한 실용적인 기술이 주로 소개됐고 ‘혁신상’을 받았다. 존디어의 트랙터가 미국의 농가들이 실제로는 접근할 수 없는 ‘꿈의 트랙터’였다면 과연 이 정도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진정한 목적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기술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Real purpose. Real tech. Real impact).” 그가 말하는 목적과 기술, 영향 등은 나라마다 처한 사정으로 다를 터다. 당장 우리는 어떤가. 정부와 지자체가 스마트팜, 수직 농장 등 ‘애그테크’를 미래 농업의 길로 삼고 보급하려 하지만 농가 소득 연 3000만원 언저리에, 빚만 잔뜩 진 청년농들이 애그테크에 뛰어들기에는 부담이 크다. 농가의 고민을 풀기 위한 기술이 아닌, 정부의 미래 비전에 따라 강요되는 기술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같은 기술이라도 방향을 바꾸면 다른 솔루션이 나온다. 한국의 스타트업 AIS는 하우스가 아닌 노지(맨땅)에서 자라는 작물의 생산량을 높이는 ‘노지 스마트팜’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작물의 품종, 토질, 기후조건 등 각종 데이터를 분석해 농가에 최적의 재배 방식을 제안한다.

이를 이용하면 노지작물의 생산량이 20~30% 높아져 농가 소득 향상에 도움이 된다. 수억~수십억원에 이르는 스마트팜 시설 투자 비용도 아낄 수 있다. 수직 농장을 운영하는 메타그린은 곰취, 고추냉이 등의 모종을 생산해 농가에 공급한다. 고소득 모종을 수직 농장에서 규격화해 공급하면 농가의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

기술만능의 한국이 배울 큰 덕목

56살의 CES가 처음 묻기 시작했다.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 사람들이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기술인가. 첨단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어떤 방식으로 높일 것인가. 기술만능주의에 빠진 한국 사회가 CES에서 봐야 할 것은 존디어의 완전자율주행 트랙터가 아닌, 그걸 가능케 했던 그 질문들이 아닐까.

이재덕 산업부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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