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하루를 살더라도 긍지를 가지고

유성환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이집트학 박사 2023. 1. 1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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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력 기준 인류 문명, 단 28초 걸린 ‘사상누각’
지구 생태자원 과소비, 우리 수명도 단축 초래…종말 생각하며 변화를
유성환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이집트학 박사

‘빅히스토리’ 혹은 ‘거대사’ 관점에서 인류 역사를 설명할 때 즐겨 쓰는 방법이 있다. 약 138억 년에 이르는 빅뱅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1년으로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우주력’이라고 하는데 우주 진화와 생명 출현, 그리고 인류문명의 발전까지를 아우르는 이 우주적 달력에 따르면, 태양계가 탄생한 때는 9월 16일경이며 다세포 생물이 출현한 때는 12월 1일경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의 경우, 고인류가 직립보행을 하기 시작한 때는 12월 31일 오후 9시 25분쯤이며 초기 인류가 출현한 것이 오후 10시 24분쯤이었다. 그리고 오후 11시 59분 32초부터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11시 59분 46초에 문자가 발명되었다. 요컨대 현생인류가 수렵채집 생활을 끝내고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건설한 것이 우주력으로는 고작 28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던 것이다.

우주력을 사용한 이런 식의 묘사방식은 인류문명이 얼마나 짧은 시간에 극적으로 발전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우주력을 다시 살펴보면 인간과 관련한 모든 사건이 12월 31일 단 하루 만에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주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식의 묘사는 무심코, 아니면 의도적으로 인류 역사의 한쪽 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부연해서 말하자면, 마치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서의 구절과 같이 새롭게 시작되는 1월 1일부터는 인류 앞에 무한히 밝은 미래가 무한히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부지불식간에 심어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갑고 어두운 우주 속 인류의 운명은 이와는 정반대일 가능성이 거의 100퍼센트다. 빅뱅 이후 138억 년이 어떻게 우리가 쉽게 실감할 수 있는 1년으로 환산되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너무나도 긴 단위의 시간을 압축하다 보니 우주력의 1개월은 무려 10억 년, 우주력의 하루는 줄잡아 400만 년에 해당한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6500만 년 전 멸종했다고 - 보다 정확하게는 그중 일부가 조류로 진화했다고 - 알려진 공룡의 전성기가 우주력으로는 인류가 기지개를 켜고 등장하기 불과 이틀 전인 12월 29일이다. 아무튼 우주력의 새해인 1월 1일 이후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될까?

과학자들은 한 종의 수명을 대개 100만~500만 년으로 본다. 현생인류라고 불리는 우리가 다른 영장류와의 공통조상으로부터 분화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20만 년 전이라고 하니 종으로서의 인류의 수명은 앞으로 어림잡아 80만~420만 년 정도가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인류가 500만 년으로 추산되는 천수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우주력 1월 2일까지 존재할 확률은 슬프게도 0으로 수렴한다. 사실 앞으로 약 2만 6000년 뒤인 0시 1분까지만 살아남는 것만도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온 우리 인류에게는 칭찬해 마지않을 업적이 될 것이다. 언감생심 1월 1일 반나절 동안 생존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우주력에서 인류는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그저 하루살이일 뿐이다.

‘기후위기’나 ‘지구 온난화’로 대변되는 전 지구적 위기 이야기는 이미 수십 년간 수많은 매체를 통해 지겹게 알려진 내용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한두 번쯤은 어디선가 접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지구 오버슈트 데이’(Earth Overshoot Day)라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는 ‘지구 생태용량 초과의 날’이라고 하는데 인류가 망쳐놓은 환경이 지구의 순환처리 능력을 초과하는 시점을 의미한다. 1971년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이 ‘오버슈트 데이’는 성탄절인 12월 25일이었다. 그것이 2022년 작년에는 7월 28일 한여름에 찾아왔다. 게다가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처럼 산다면 지구의 일 년 치 생태자원이 고갈되는 날은 이것보다 훨씬 빠른 4월 2일이 된다고 한다. 나머지 9개월 동안은 내년의 자원을 미리 끌어 써야 한다. 자원만 당겨쓰는 것이 아니다. 지구의 수명도 우리의 수명도 당겨지게 된다.


어차피 우주력으로는 하루를 버티지 못할 운명이니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면 반박할 재간이 없다. 그러나 ‘메멘토 모리’, 즉 종말을 인지하면 삶이 좀 겸손해진다고 들었다.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1년에 두 번 하는 문화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주력의 새해 인사는 한 번이면 족할 것이다. 비록 우주에서의 수명은 하루살이일지라도 우리가 남긴 발자국은 우주력 전체를 관통할 수도 있다. 어려울수록 빛나는 것이 긍지이다. 결코 바뀌지 않을 천형과 같은 종적 특성을 새해에는 조금이나마 거슬러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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