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다정한 세계를 알아차리는 일
새해를 맞아, 친구는 단체 대화방에 해돋이 사진을 보내왔다. 1월1일에 무학산에 올라 직접 찍어온 2023년의 첫 해란다. 몇몇 친구들은 “과학 선생님이 그런 거 보러 가도 돼?”라며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새로운 해가 뜬다’는 비과학적인 믿음을 가져서 되겠느냐는 지적이다. 다들 웃어넘겼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우리 중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그 또한, 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른다는 인간 중심적 시각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한 해가 가고 새로운 연도가 온다는 인식은 인간의 임의적인 구분에 근거한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관에 이미 폐기된 천동설까지 더해진 사고가 ‘새해 첫 일출’을 의미화하는 배경이겠다. 그렇다면 일출을 보러 가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일은 비이성적이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과학자 마빈 민스키는 ‘앎’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우선 그 앎의 상태를 진정으로 믿는 자가 단 하나의 안정된 존재라는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에 관한 천문학적인 지식을 지니고도, 태양이 떠오른다는 관습적인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여러 상이한 관점이 존재하고 그중 무엇을 사용할지는 우리 마음의 상태에 달렸다. 따라서 햇빛이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다다르는지 아는 일과 태양이 바다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장면 자체를 생경하고도 벅차게 느끼며 새날을 밝힐 해가 솟는다고 믿는 일은 배치되지 않는다. 어디에 좀 더 깊고 너른 마음을 쏟을 것인지 정하면 그뿐.
어둑한 새벽, 지친 몸을 이끌고 산에 올랐을 친구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그는 야윈 다리로 힘겹게 가파른 산을 올랐을 테다. 그러고는 잔잔히 타는 해 앞에 서서 자신이 언제나 귀히 여기는 학생들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친구가 보내온 일출 사진을 다시 들춰보았다. 이 세계에 난 온전한 구멍 같은 해에다 대고, 조용히 새해 소망을 털어놓았다. 우선 멀리서 사진을 보내온 친구의 건강을 기원했다. 요즘 그는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리곤 하니까. 강의실에서 나를 스쳐 간 학생들의 앞날도 멋대로 축복해주었다. 나를 성장하게 한 나의 어린 스승들이 어디에서든 명랑하게 살아갔으면 한다. 더불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편안한 나날을 보내기를, 나를 미워하는 이들은 나를 덜 미워할 수 있게 여유로워지기를 바라도 보았다.
이에 더해, 2023 계묘년에는 매해 빌어왔던, 다정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사소한 소원보다 더 거창한 소원을 빌어보려 한다. 다정한 사람 되기 말고 다정한 세계 되기. 혐오가 자랑이 되기까지 하는 시대에 이것은 불가능한 기대로 보인다. 또다시 교육과정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지워졌고,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권리를 되찾으려는 이들의 외침은 소음으로 간주된다. 2022년의 날들도, 어제도, 오늘도 세계는 다정하지 않았다. 내일도, 모레도, 새해에도 세계는 다정해질 수 없으리라고 보는 것이 귀납적 추론에 의하면 더욱 설득력 있는 예측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믿기로 한다. 조금 더 선하고 따뜻한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행보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증하기 위해서, 다정한 세계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려 한다. 우리는 단일 행위자(single-agent)가 아니므로, 동시에 여러 앎을 거느릴 수 있다. 다정한 세계란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임을 분명히 지각하면서도, 다정함으로만 가득한 세계가 당도하리라는 믿음을 가져볼 수 있다. 양자를 모두 견지하는 일이 결코 우리의 앎에 배치되지 않는다. 2023년은 다정함만이 넘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는 낙관을 실천적 앎으로 삼아본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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