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김대중 모두 대한민국의 자랑, 특정지역 상징이 아니다
광주에서 초중고를 다닌 나에게 박정희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독재자이자 지역 감정을 악용한 정치인으로 각인돼 있었다. 고향 어르신들은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됐으면 박정희보다 나라를 잘 이끌었을 것이라 하셨고, 나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진 채 서울 소재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2007년 기생충학 수업 시간이었다. 은퇴를 앞둔 노교수님이 ‘대한민국 기생충 보건 정책’에 대해 강의했다. “40년 전만 해도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없어 변이 그대로 지하로 스며들어 생긴 우물물을 마셨고, 변을 비료로 썼기 때문에 기생충이 창궐했습니다. 보릿고개 때는 부실한 영양 상태에 있던 처녀가 갑자기 쓰러져 죽는 경우도 많았는데, 부검해 보면 장이고 폐고 뇌고 할 것 없이 기생충이 그득했답니다.”
교수님은 이어서 말씀했다. “이승만 때 채변 봉투와 구충제 보급, 상하수도 공사 계획은 세워놨는데, 돈이 어디 있고 기술이 어디 있나요? 결국 박정희가 월남 파병하고, 중동이랑 독일에 인력 보내고, 일본에 구걸이라도 해서 돈과 기술 들여와 채변 봉투랑 구충제를 본격적으로 보급하고 상하수도 설비를 들여다 놓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지역에서 상하수도 공사를 진행할 인부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우리도 하면 됩니다! 잘살아봅시다!” 이러면서 마을 사람들한테 자부심과 희망을 심어주고 협조를 이끌어 낸 게 ‘새마을운동’ 아니겠어요? 결과는 대단했습니다. 기생충이 다 없어져 버리는 바람에 저 같은 기생충학자들이 할 일이 없어져버렸지 뭡니까? 허허. 여러분, 박정희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다 공이 있고 과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강의를 듣고 생존이 우선이던 신생 독립국가의 지도자를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 된 지금 기준으로 바라봐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되어 지독한 가난으로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들을 보고 난 뒤에는 경제를 발전시켜 빈곤과 질병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오히려 국민이 인권과 민주주의에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게다가 이런 분들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만든 건강보험도 박정희가 도입하지 않았나?
선입견을 버리고 박정희를 공부하고 난 뒤에는 그를 존경하게 됐다. 당시 우리보다 부강했던 북한은 지속적으로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된 가운데 주한 미군마저 철수하려는 최악 상황에서, 가난한 농경 국가를 선진 공업 국가로 가는 막차에 태우기 위해 분투하는 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리더십에 국민은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희생과 높은 지지로 화답해 세계가 부러워하는 기적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호남도 마찬가지였다.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여수·광양 지역이 공업단지로 개발되는 것을 보고 민주당의 전신 정당들보다 박정희의 공화당을 더 지지했다.
만약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돼 경제 분야에서 외자 유치 반대, 내수 중심 경제 운용, 경부고속도로 반대, 노동자 경영 참여, 부유세 도입, 안보 분야에서 4대국(미국·소련·중공·일본)의 안전보장만 믿고 향토예비군 폐지, 군복무 단축 등의 공약을 실천했다면 대한민국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심지어 김대중 스스로도 정책 노선을 바꾸지 않았나. 김대중은 1997년 대선에서 평화적 정권 교체로 민주화를 완성시켰고, 그의 목숨을 위협했던 이들에게 정치 보복을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단합을 이끌어 내 IMF를 극복했다. 또 노동 유연화, 대일 관계 개선, IT 선진화 정책을 실현해 우파 진영에서도 칭찬을 받았다. 1971년의 김대중은 틀렸고, 1997년의 김대중은 옳았던 것이다.
결국 박정희도 김대중도 대한민국의 쓰임을 받아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적 소임을 다한 것이다. 모두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정치인인데 특정 지역의 상징으로 끌어들여 숭배하며 그의 후신임을 자처하는 정당에 무조건 표를 주고, 상대 정치인을 비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호남의 어르신들과 청년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선입견 가지고 박정희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대한민국이 성장하는 과정을 악습이 쌓여가던 적폐 시간이 아닌, 현명한 정치인들의 활약으로 식민지였던 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기적의 시간이었다고 가르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역사를 긍정하는 생각이 나라를 더 부강해지는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 한 외신기자가 쓴 책 제목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대한민국, 그리고 대한민국을 빌딩(builiding)한 박정희에 대한 긍정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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