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줌인]패스에 눈뜰 때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2023. 1. 19. 03:01
어떤 세대에게 만화 ‘슬램덩크’는 인생의 한 시기를 떠올릴 때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1990년대 중후반 농구 만화 연재가 끝난 뒤로도 한참 동안 중고교 각 반에 만화 속 명대사 “나는 천재니까”를 시도 때도 없이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이 하나씩 있었고, 그들은 농구공을 잡으면 자신을 만화 속 주조연인 강백호나 정대만으로 불러달라며 눈을 반짝였다. 어떤 아이들은 만화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장래 희망란에 ‘전국 제패’라고 적어 내기도 했다.
기자도 한때 전국 제패를 꿈꿨다. 농구 좀 하는 내 친구 ‘월곡동 윤대협’과 의기투합해서 동네 근린공원을 평정한 뒤 풋내기들 한 수 가르쳐 주러 서울 동북권 길거리 농구의 메카 고려대 야외 농구장으로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전국 제패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었는데 생각보다 수준 높은 형들 농구를 보고 주눅 들어 코트 옆에서 드리블만 연습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주눅 들 땐 슬램덩크가 또 보약이라서 집에서 몇 번씩 읽으면서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되뇌었다.
대학생 땐 슬램덩크 만화에 나온 나이키 농구화를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름 반바지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농구화를 기어이 신고 다녔다. 이렇듯 어떤 이들에겐 원작 만화가 추억과 단단히 맞물린다. 만화를 삶의 일부처럼 여기는 광팬이 꽤 많다. 그들에게 원작은 단순한 만화 이상이다.
그러니 만화 슬램덩크의 클라이맥스인 일본 전국 고교생 종합체육대회(인터하이) 토너먼트 2차전을 다룬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한다고 했을 때, 원작 팬들의 추억 공유회가 열리리라는 건 이미 예상했다.
워낙 큰 팬덤을 가진 작품이라서 기존 마니아들의 지지 속에 추억에 기대 기존 서사를 안전하게 옮겨오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서사나 해석을 넣을 여지까진 없으리라고 봤다. 경기 결과가 중요한 스포츠물 특성상 캐릭터와 세계관이 구축돼 있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 한 보여줄 수 있는 서사엔 한계도 있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원작 팬들은 누구나 결과를 다 안다.
극장판에선 스포트라이트의 비중이 원작 주인공 강백호에서 조연 송태섭에게로 넘어갔다고 들었지만, 이 역시도 슬램덩크의 외전 격 작품들을 이미 섭렵한 광팬들에겐 익숙한 설정이기도 했다. 이번 작에서 구태여 새로움까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본 뒤엔 완전히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길 가지고 이런 재창조를 해내다니. 극장판은 주인공 팀 북산이 인터하이에서 고교 농구 최강자 산왕공고와 만나 치르는 대결을 다루는데 서사 줄기는 원작과 동일하다.
다만 원작이 저마다 마주하고 있는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성장이 이뤄지는 모습을 그린다면, 극장판은 조금 더 그들의 관계에 포인트를 둔다.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다. 극장판 주인공이 패스를 뿌리는 포인트가드라는 점이 극장판의 지향점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극장판은 송태섭의 개인사를 비추면서 어떻게 독단적인 성격이 됐는지를 조명한다. 송태섭의 어둡게 닫혀 있는 모습이 주변 이들에겐 비호감으로 비친다. 송태섭 눈에 다른 이들도 비호감이긴 마찬가지다. 송태섭은 세련된 패스를 받아내지 못하는 주장 채치수를 내심 못마땅해한다. 슈터 정대만과는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고, 주전 선수인 서태웅과는 말 한마디 섞지 않은 걸로 묘사된다. 회상을 통해 불화가 드러난다.
회상이 끝나면 장면은 경기장으로 돌아온다.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들은 경기장에선 각자 저마다 자신의 농구를 처절하게 해내고 있다. 그 점을 이해할 때, 서로를 의지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차츰 스며든다. 단신 가드 송태섭을 약점으로 여긴 상대팀이 ‘존 프레스’ 전술로 압박할 때 동료들은 송태섭을 의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송태섭은 다른 팀원들을 믿고 의지하며 패스를 뿌린다. 송태섭의 패스가 다른 팀원들의 손으로 가서 감길 때 승부가 요동친다.
원작 만화에선 강백호가 마지막 집념을 발휘해 넘어지며 공을 잡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장면에서 감동을 자아내지만, 극장판은 같은 장면에서 강백호가 그렇게 잡은 공을 자신의 라이벌인 서태웅에게 던져주는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온다. 관계로 무게추가 옮겨져서 이야기성이 극대화된다. 극장판은 결국 송태섭을 시작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패스하는 법을 깨닫는 과정이다.
하긴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전국 제패’일 리 없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관계가 중요하다. 지향점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이 넓어지고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만화 완결 이후 27년이 지난 지금도 슬램덩크로 인생을 배운다.
1990년대 중후반 농구 만화 연재가 끝난 뒤로도 한참 동안 중고교 각 반에 만화 속 명대사 “나는 천재니까”를 시도 때도 없이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이 하나씩 있었고, 그들은 농구공을 잡으면 자신을 만화 속 주조연인 강백호나 정대만으로 불러달라며 눈을 반짝였다. 어떤 아이들은 만화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장래 희망란에 ‘전국 제패’라고 적어 내기도 했다.
기자도 한때 전국 제패를 꿈꿨다. 농구 좀 하는 내 친구 ‘월곡동 윤대협’과 의기투합해서 동네 근린공원을 평정한 뒤 풋내기들 한 수 가르쳐 주러 서울 동북권 길거리 농구의 메카 고려대 야외 농구장으로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전국 제패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었는데 생각보다 수준 높은 형들 농구를 보고 주눅 들어 코트 옆에서 드리블만 연습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주눅 들 땐 슬램덩크가 또 보약이라서 집에서 몇 번씩 읽으면서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되뇌었다.
대학생 땐 슬램덩크 만화에 나온 나이키 농구화를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름 반바지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농구화를 기어이 신고 다녔다. 이렇듯 어떤 이들에겐 원작 만화가 추억과 단단히 맞물린다. 만화를 삶의 일부처럼 여기는 광팬이 꽤 많다. 그들에게 원작은 단순한 만화 이상이다.
그러니 만화 슬램덩크의 클라이맥스인 일본 전국 고교생 종합체육대회(인터하이) 토너먼트 2차전을 다룬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한다고 했을 때, 원작 팬들의 추억 공유회가 열리리라는 건 이미 예상했다.
워낙 큰 팬덤을 가진 작품이라서 기존 마니아들의 지지 속에 추억에 기대 기존 서사를 안전하게 옮겨오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서사나 해석을 넣을 여지까진 없으리라고 봤다. 경기 결과가 중요한 스포츠물 특성상 캐릭터와 세계관이 구축돼 있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 한 보여줄 수 있는 서사엔 한계도 있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원작 팬들은 누구나 결과를 다 안다.
극장판에선 스포트라이트의 비중이 원작 주인공 강백호에서 조연 송태섭에게로 넘어갔다고 들었지만, 이 역시도 슬램덩크의 외전 격 작품들을 이미 섭렵한 광팬들에겐 익숙한 설정이기도 했다. 이번 작에서 구태여 새로움까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본 뒤엔 완전히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길 가지고 이런 재창조를 해내다니. 극장판은 주인공 팀 북산이 인터하이에서 고교 농구 최강자 산왕공고와 만나 치르는 대결을 다루는데 서사 줄기는 원작과 동일하다.
다만 원작이 저마다 마주하고 있는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성장이 이뤄지는 모습을 그린다면, 극장판은 조금 더 그들의 관계에 포인트를 둔다.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다. 극장판 주인공이 패스를 뿌리는 포인트가드라는 점이 극장판의 지향점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극장판은 송태섭의 개인사를 비추면서 어떻게 독단적인 성격이 됐는지를 조명한다. 송태섭의 어둡게 닫혀 있는 모습이 주변 이들에겐 비호감으로 비친다. 송태섭 눈에 다른 이들도 비호감이긴 마찬가지다. 송태섭은 세련된 패스를 받아내지 못하는 주장 채치수를 내심 못마땅해한다. 슈터 정대만과는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고, 주전 선수인 서태웅과는 말 한마디 섞지 않은 걸로 묘사된다. 회상을 통해 불화가 드러난다.
회상이 끝나면 장면은 경기장으로 돌아온다.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들은 경기장에선 각자 저마다 자신의 농구를 처절하게 해내고 있다. 그 점을 이해할 때, 서로를 의지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차츰 스며든다. 단신 가드 송태섭을 약점으로 여긴 상대팀이 ‘존 프레스’ 전술로 압박할 때 동료들은 송태섭을 의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송태섭은 다른 팀원들을 믿고 의지하며 패스를 뿌린다. 송태섭의 패스가 다른 팀원들의 손으로 가서 감길 때 승부가 요동친다.
원작 만화에선 강백호가 마지막 집념을 발휘해 넘어지며 공을 잡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장면에서 감동을 자아내지만, 극장판은 같은 장면에서 강백호가 그렇게 잡은 공을 자신의 라이벌인 서태웅에게 던져주는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온다. 관계로 무게추가 옮겨져서 이야기성이 극대화된다. 극장판은 결국 송태섭을 시작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패스하는 법을 깨닫는 과정이다.
하긴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전국 제패’일 리 없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관계가 중요하다. 지향점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이 넓어지고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만화 완결 이후 27년이 지난 지금도 슬램덩크로 인생을 배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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