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 법적 쟁점…피해자 ‘동의’ 없이 가능한가, 전범 기업이 ‘채무’ 인정할까
‘상징성 큰 사건 불가’ 지적
“강행 땐 법정 공방의 시작”
정부가 강제동원(징용) 배상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한 ‘제3자 변제안’을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 방안의 실효성을 두고 법조계에서도 해석이 엇갈린다. 명확한 판례도 없다. 피해 당사자의 동의가 전제되지 않을 경우 또 다른 법정 공방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부는 지난 12일 ‘강제징용 해법 논의 공개토론회’에서 ‘제3자 변제안’을 공식화했다.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일본 기업의 채무를 제3자가 대신 변제할 수 있다면서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지급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2018년 판결했는데, 제3자인 국내 재단이 미쓰비시중공업 대신 배상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게 정부안의 골자이다.
법조계에선 ‘제3자 변제’가 당사자의 동의 없이도 가능한지를 두고 엇갈린 해석이 나온다. 민법 제469조 1항은 “채무의 변제는 제3자도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다만 이 조항에는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정부안에 비판적인 측에선 당사자인 채권자(피해자)가 반대하는 대리 변제를 제3자가 할 수 없다고 본다. 역사적·사회적 상징성이 큰 강제징용 사건 특성상 단순히 돈을 받고 끝내는 문제로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피해자들은 전범 기업이 사죄하고 반성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배상금을 낼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한 법학자는 18일 “보통의 경우라면 채권자는 돈만 받으면 되니까 (대리 변제가) 가능하겠지만, 모든 채권이 성질상 다 똑같지 않다는 게 문제”라며 “이번 사건의 경우 채무의 성질 자체가 제3자가 나서서 대신 갚아줄 성질의 채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가 받아야 할 배상금은 법원에서 확정판결로 인정된 ‘법정채권’이므로 당사자의 동의 등 사적 자치권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외교부는 ‘병존적 채무변제’ 방안도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병존적 채무변제란, 전범 기업의 채무는 유지하면서 제3자(재단)가 채무를 같이 부담하는 것이다. 정부는 과거 판례 등을 근거로 들어 병존적 채무변제의 경우 채권자의 동의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채무자가 바뀌는 게 아니라 추가되는 것이어서 채권자가 손해를 볼 여지가 없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병존적 채무변제 역시 채무자의 동의가 전제돼야 한다고 반박한다. 민법 제469조 2항은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는 채무자 의사에 반해 변제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김정희 변호사는 이 부분을 지적하며 그간 미쓰비시중공업이 대법원 판결이 무효라고 주장한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채무자가 본인이 채무자가 아니라고 하면 채무 자체를 넘겨줄 수가 없다”고 했다.
정부가 당사자의 동의 없이 ‘제3자 변제안’을 밀어붙일 경우 또 다른 법적 다툼이 불가피해 보인다. 재단은 채무를 인수한 후 피해자 측이 대리 배상을 거부하면 배상금을 법원에 공탁해 채무 관계를 소멸시키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대리 변제를 거부하는 강제동원 피해자가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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