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휩쓸린 ‘방과후 강사’, 그 뒷얘기
김춘경 | 방과후 강사
나는 16년 가까이 초등학교 방과후 학교에서 공예를 가르치는 방과후 강사다. 대학 졸업하고 전공과 연관 없는 곳에서 일하다 허리디스크 수술을 한 뒤 이른바 경단녀(경력단절여성)가 됐다. 취미로 종이공예를 배운 걸 계기로 집 근처 초등학교에서 ‘종이접기와 북아트’라는 과목으로 아이들을 가르친 것이 방과후 강사의 첫걸음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다양한 종류의 공예를 접할 수 있는 토탈 공예를 가르쳤는데 전공을 살릴 수 있고 오전에 집안일과 내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참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공예를 가르친다는 것이 무척 감사하고 행복했다.
일주일에 한 학교에서 80분씩 2차례 수업하던 내가 일주일에 5개 학교에 나가기까지 몇 해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열정과 열의가 넘쳤고 천직이라는 생각으로 온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어떤 해는 토요일 방과후 수업까지 주 6일 수업을 한 적도 있다. 그때는 한 분기에 200명 정도를 가르쳤다. 바쁘고 힘들었지만 그것조차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기만 했다. 그게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그렇게 난 방과후 학교의 강사로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2020년 코로나19 세계적 대확산(팬데믹)이 시작됐다. 나에게 2020년은 지옥의 해가 돼버렸다. 나의 이런 생각들이 혹시 우울증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걱정과 함께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2020년 2월부터 학교 수업이 정지됐다. 학교는 기약도 없이 기다려 보라는 말만 무한 반복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일은 또 어떻게 보내지? 그냥 이대로 잠들어서 안 깨어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분명 나만 힘든 게 아닐 텐데,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주변에서 해외로 여행을 못 가서 제주도만 간신히 갔다 왔다며 코로나19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어려움 없이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했다. 난 그런 사람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아니면 조상 대대로 덕을 참 많이 쌓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심한 자괴감에 빠졌고 자존감은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방과후 강사는 특수형태고용직이라 코로나19라는 세계적 재난으로 수업을 못 해도 보전 한 푼 받지 못했다. 국가에서 주는 긴급지원금도 아르바이트 때문에 부과된 일회성 고용보험료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고용이 불안한 방과후 강사를 왜 시작했을까’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일에 대해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 남 일처럼 생각하고 뉴스에서만 보던 비정규직의 서러움을 코로나19 때문에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앗! 내가 바로 비정규직이었구나! 지금까지 왜 이걸 깨닫지 못했는지 주책없이 길거리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실업 상태가 되어도 고용보험 덕분에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고 한다. 그 사람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것 같다. 난, 그 고용보험이 없다. 고용보험이라는 게 나와는 아주 상관없는 아주 먼 별나라 얘기인 것만 같다. 그래서 뙤약볕이 내리쬘 때도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장마에도 꼬박 일주일을 교육청 앞에 혼자서 피켓시위란 것도 해봤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기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기로 했다. 서러움이 북받쳐 흘렀다. 눈물인지 장맛비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마스크를 쓴 채 울면서 1인 시위를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자식들을 생각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일자리를 찾았다. 너무 불안한 마음에 새벽에 폐휴지라도 주우러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너무도 절실했다. 그런데 2019년 말에 이미 학교마다 2020년 계약이 다 된 상태여서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매일 구직난과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보면서 밤잠을 설쳤다. 난 큰 물류센터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몹시 어렵게 구했다.
‘그럭저럭 봄은 버티겠구나, 2학기 때는 수업을 할 수 있겠지.’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고 근육통으로 다리를 절룩거려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견뎌냈다. 그런데 그 물류센터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당하게도 자가 격리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난 확진자와 접촉한 적도 없고 일하는 시간대도 전혀 달랐는데 억울함보다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더 앞섰다. 특히 지병이 있어 곁에서 돌봐드려야 하는 친정 부모님이 더 걱정이었다. 다행히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자가 격리를 한 이력 탓에 어디 한 군데 일을 다닐 수가 없었다. 정말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대출 원금과 이자, 카드값이며 공과금은 어쩌나 하는 생각에 밤에 잠이 안 오고 입안이 헐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세상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극단적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 이러다가 나도 모르게 큰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방과후 수업을 나갔던 학교에 서류접수와 면접을 통해 방역 도우미 일을 구했다. 시급 1만300원에 주 14시간 일이란다. 그나마 감지덕지다. 그런데 정말 쌀값과 반찬값만 주고 나면 돈은 공중으로 날아가는 공기처럼 없어졌다. 오후에는 다른 일을 하고 싶었지만,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코로나19에 감염될까 수없이 망설이다 주저앉았다. 그렇게 갈등과 고민을 할 때 운 좋게 지자체의 하루 8시간 방역 일자리를 얻었다. 학교 방역을 하면서 간신히, 정말 간신히 연명하는 상황이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친정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지병을 앓고 계셨지만, 해는 넘기고 떠나실 줄 알았다. 믿기지 않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부모님의 그늘이 그렇게 큰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자꾸 못해 드린 것만 생각나고 시도 때도 없이 울컥울컥 눈물이 났다.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삶이 다 허망하고 현실을 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저 숨만 쉬고 살았다.
코로나19가 시작되고 봄부터 방과후 수업이 없어 수입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남편도 직업이 프리랜서인지라 생활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몇 개월 전 카드회사에서 비싼 이자를 내면서 카드론 대출을 받았다. 당장 몇 개월은 버티겠지만 그 뒤가 정말 막막했다. 한 해 동안 받은 대출 금액이 벌써 얼마인지 모르겠다. 너무 무리해서 집 장만을 했나 자책이 밀려왔다. 경기도 변두리 지역,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5층짜리 빌라인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하는 후회와 함께 원금과 이자를 상환 못 하면 신용불량자가 돼 집과 직장까지 잃게 될까 봐 전전긍긍으로 세월을 보냈다. 또 겨울은 어떻게 지내야 할지 걱정이 됐다.
그렇게 코로나19 팬데믹 2년을 보냈다. 다른 지역은 대부분 방과후 수업이 재개됐지만, 내가 사는 경기도 지역은 만 2년 동안 거의 수업을 못 했다. 그렇게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지난해 초 작은아들의 대학 등록금으로 인한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였다.
작은아들이 작년에 아파서 어렵게 들어간 대학을 휴학하게 되었다. 일 년 몸조리하고 복학을 해야 하는데 준비해둔 등록금이 하나도 없었다. 국가장학금을 신청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못 받게 됐다. 학자금 대출까지 불가능하다는 통지를 등록금 마감 하루 전날에 받았다. 이미 2년간의 공백으로 지출이 정해져 있고 남편까지 직장을 못 다니게 돼 현금서비스나 카드론 대출까지 다 받은 상태라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빌라도 빨간 딱지가 붙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마감 하루 전 소상공인 방역지원금 300만 원 대상자가 됐다는 문자가 왔다. 혹시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몇 번을 확인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청했다. 그때만 해도 이 방역지원금이 방과후강사노조 위원장님과 지부장님들이 그렇게 고생고생하여 얻어진 건지 긴가민가했다. 작은아들 등록금 해결에 온 신경을 쓰느라 생각 자체를 못하고 있었다. 다음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전화로 확인했더니 소상공인 방역지원금 300만 원이 입금된 걸 알았고, 그제야 그토록 고생하면서 노력하신 방과후강사노조의 결실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등록금 마감일이 내일이고 오늘이 기숙사 들어가는 날이기에 안절부절못하는 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내 눈에는 뻔히 보이는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작은아들을 보면서 이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등록금이 입금되는 걸 작은아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아들이 편한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어미로서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행여나 이 일을 계기로 또 아픈 몸이 재발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다. 통장을 손에 드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빛의 속도로 등록금 입금부터 했다. ‘행여나 밀린 카드 값과 대출금이 먼저 빠져나가면 어쩌지’하는 걱정과 ‘혹시 계좌번호를 잘못 쓴 건 아니겠지’하는 생각에 손가락을 덜덜 떨면서. 작은아들에게 입금했다고, 통장 내역을 보여주고 저녁 먹자 했더니 그제야 아들도 한술 뜨면서 환하게 웃었다.
내 나이 올해 54살이다. 앞으로 얼마나 이 방과후 수업을 할 수 있을까? 방과후 강사 생활 15년 동안 배운 거, 아는 거라고는 방과후 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거밖에 없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면서 의욕 넘치게 방과후 교육에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 2년 동안 난 뭘 하면서 살았을까 생각에 잠겼다. 부끄럽지만 방과후강사노조 활동도 활발히 못했다. 비록 노조 활동을 못 하더라도 내가 조합원임을 당당하게 밝히며 살려고 다짐한다. 부당한 일들을 겪게 되면 “저 방과후강사노조 조합원인데요, 학교에서 하는 이런 일들을 제가 속한 노조에서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등 소심한 표현을 학교에 해보려고 한다. 지난 2년처럼 맥없이 당하지 않으려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방과후 강사 생활 15년을 하면서 부당한 대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이렇게 맥없이 당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싫으면 싫다고, 없으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려고 한다.
지난해 3월 둘째 주부터 수업 나가기로 계약서를 쓴 학교에서 하나둘씩 연락이 왔다. 4월부터 수업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전만큼 많은 아이가 방과후 학교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난 몇 명이라도 수업하는 지금이 행복하다. 나는 이 일이 참 좋다. 내가 좋아하는 공예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 ‘내가 정말 잘했구나’, ‘내가 정말 살아서 숨을 쉬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주어진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동안 왜 학교만 멈춰있었을까? 너무 궁금하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나오는 대답이었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다.
난 오늘도 철저하게 자기최면을 걸면서 용기를 내고 있다. 내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하늘나라에서 나를 보고 계실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남은 가족들을 위해 기도로 한평생 함께하신 우리 엄마를 위해서라도 죽을 만큼 힘들어도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고…. 이 땅에 비정규직의 서러움이 조금이라도 없어지는 날, 그날까지 비정규직의 서러움과 걱정 없이 아이들을 만나서 웃고 떠들면서 가르쳐 주고 싶다. 이게 나의 무리한 욕심인지 물어보고 싶다. 누구에게든.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지난해 주최한 ‘12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입니다. <한겨레>는 해마다 수상작 일부를 게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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