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내식당파 김대리, 어쩐일로 14만원짜리 버거 먹었을까
연구원이 2021년 7월부터 2022년 8월 사이 노출된 잡지·서적·기사 등을 통해 25개 외식 트렌드 키워드를 도출하고 이를 토대로 외식업계 종사자와 관련 전문가, 소비자(인플루언서) 등 20명을 대상으로 2023년 외식업계 트렌드에 대한 전망을 크게 외식 행태, 메뉴, 소비감성·마케팅, 경영 등 측면에서 조사해 종합적으로 집계한 결과물이다.
올해의 외식 트렌드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힌 것은 양극화다. 고물가 영향으로 외식 소비 양극화는 올해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소득 격차에 따른 소비 양극화뿐만 아니라 ‘짠테크(소비를 줄이고 각종 금융상품 혜택을 최대한 활용하는 자산 관리법)’와 ‘플렉스(자기 보상 또는 과시를 위한 호화로운 지출)’ 등 양극단의 소비 성향을 동시에 갖고 있는 소비자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과거 불황기와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소 가성비가 높은 구내식당이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떼우면서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근사한 한 끼를 위해 거액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구찌·디올·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 식음료(F&B) 매장은 경기 침체 속에서도 예약이 하늘에 별 따기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에서 3스타에 등극한 서울 한남동의 이노베이티브 다이닝 레스토랑 ‘모수 서울’ 역시 디너 코스 가격이 1인당 32만원에 달하지만 주말 예약은 이미 수개월 뒤까지 꽉 차 있는 상황이다. 투뿔(1++) 한우로 만든 14만원짜리 ‘1966 버거’를 파는 ‘고든램지 버거’는 주말 점심·저녁 시간엔 대기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동시에 편의점의 도시락과 간편식, 즉석 섭취 식품을 파는 대형마트의 델리 코너도 가성비 높은 외식 메뉴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런치플레이션(런치+인플레이션)’으로 직장에 직접 도시락을 싸가거나 식당에 가더라도 백반·분식·국밥·패스트푸드 등 저렴한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곳을 선호하고, 곡물 바·프로틴 음료 등으로 식사를 대신하거나 심지어는 점심을 아예 건너뛰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외식업계가 최근 식재료비·인건비 상승, 경쟁 심화, 구인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가성비 높은 식당이나 기꺼이 많은 돈을 지불할 만큼 가치 있는 미식 경험·만족감을 줄 수 있는 식당은 계속해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편의점 간편식은 다양화 추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삼각김밥, 샌드위치, 도시락, 김밥 등에 머물렀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수제비, 파스타 등 왠만한 식당 메뉴들까지 편의점에 간편식 형태로 들어와 있다. 편의점 GS25는 지난해 말 서울 압구정의 줄 서서 먹는 맛집으로 유명한 ‘도산분식’과 협업한 ‘레스토랑 간편식(RMR)’을 선보이기도 했다.
건강을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건강식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암·당뇨 등 환자용 건강관리 식단, 저염 식단 등 케어푸드와 채식 선호 소비자들을 겨냥한 비건 메뉴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일례로 현대백화점그룹의 현대그린푸드는 최근 건강식 브랜드 ‘그리팅’을 통해 11가지 케어식단 구독 서비스, 프리미엄 집반찬 판매 등을 확대하고 있다.
또 그동안은 간편식이 집밥을 대신하는 ‘가정간편식(HMR)’ 차원에서 성장해왔다면 앞으로는 외식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또는 외식을 하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외식형 간편식’이 늘어날 전망이다. CJ제일제당이 지난해 11월 스타 셰프들과 손 잡고 새롭게 내놓은 프리미엄 간편식 브랜드 ‘비비고 셰프 컬렉션’은 들깨 깻잎순볶음을 곁들인 항정살 구이, 해물 육수를 더한 새우 굴림만두 등 다이닝 레스토랑 수준의 메뉴들을 선보인다. 하림의 프리미엄 간편식 브랜드 ‘더미식’ 역시 전문점 수준의 갈비탕 등 국물요리로 최근 제품군을 확대했다.
불필요한 성분을 뺀 제로·프리 식품들도 더욱 다양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9월 출시된 롯데칠성음료의 ‘처음처럼 새로’는 약 3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2700만병을 돌파했다. 이 제품은 기존 소주와 달리 과당을 사용하지 않고 주조를 하고 대신 스테비아, 에리트리톨 등 감미료를 넣어 당류 함량이 0%인 ‘제로 슈거’ 제품이다. 제로 소주 열풍에 하이트진로 역시 이달 초 ‘진로’를 리뉴얼해 제로 소주 제품을 내놨다. 이 같은 추세는 올해부터 주요 주류 제품에도 열량(칼로리)이 표시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한편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확대된 키오스크·주문용 태블릿과 더불어 서빙 로봇 같은 푸드테크가 더욱 보편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외식업계 근로자 임금이 크게 오른 데다 정작 바쁜 시간대에는 웃돈을 주고도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식당들이 속출하면서 디지털 전환 수요가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업계 추산에 따르면 2019년까지만 해도 전국 50여 대에 불과했던 서빙로봇은 지난해 기준 3000여 대까지 크게 확대됐다.
시장 확대가 예상되면서 대기업들도 서빙로봇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SK쉴더스는 지난해 3월 배달의민족과 손 잡고 서빙로봇 렌털 서비스를 시작했다. LG전자는 지난해 5월 서빙로봇인 ‘클로이’ 서브봇을 출시했다. 삼성전자 역시 6월 자사의 로봇 브랜드인 ‘삼성봇’을 미국과 캐나다에 상표권 등록했다. 앞서 KT는 서빙·퇴식·순회 기능을 가진 자율주행 로봇 ‘KT AI 서비스로봇’을 선보인 바 있다. 배달의민족은 2019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렌털 서비스를 통해 전국 500여 곳 매장에 630여 대의 서빙 로봇을 공급해 왔다.
1인용 피자 프랜차이즈 ‘고피자’는 최근 자동 화덕 ‘고븐(Goven)’의 기능을 고도화한 ‘고븐 2.0’과 사람이 고븐 2.0에 피자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로봇이 알아서 굽고 순서대로 꺼내 자르고 고객에게 전달되기 전까지 따뜻하게 보관해주는 전자동 시스템인 ‘고봇 스테이션’을 주요 점포에 도입하면서 본격적인 상용화에 나섰다. 이 같은 푸드테크를 토대로 근로자의 업무 강도를 낮추고 제품의 품질을 균일하게 유지하겠다는 목표다.
다만 레스토랑의 메뉴 가격이 고공행진을 하는 ‘레스플레이션(레스토랑+인플레이션)’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게 연구원의 분석이다. 세계적인 고금리·고물가 상황이 계속되면서 음식 가격을 올리지 않고는 왠만한 식당들은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서울 강남구에서 선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점주 B씨는 “재료값이 너무 올라 장사를 해도 남는 게 없는데 가격을 올리는 것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질까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12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전국 3000여 개 외식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음식 값을 올릴 계획이 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면을 뽑는 제면소나 피자를 굽는 화덕을 식당 전면부에 배치하거나 특색 있는 인테리어로 비주얼 요소를 강조하는 식당들이 늘고 있는 것은 고급 레스토랑이나 핫플레이스에서 인증샷을 찍어 소셜미디어(SNS)에 올리는 등 타인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MZ세대의 소비 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실제로 MZ세대의 성지로 꼽히는 서울 성수동 일대에는 이런 ‘인증샷’ 손님들을 겨냥한 독특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식당들이 즐비해 있다. 다만 성수동에 개인 사무실을 둔 A씨는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식당들은 참 많은데 막상 들어가 음식을 먹어보면 화려한 비주얼이나 높은 가격에 비해 맛이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번 트렌드 분석을 주도한 윤은옥 한국외식산업경영연구원 부장은 “주 소비층인 MZ세대는 ‘경험이 곧 소유’라는 생각으로 접근한다. 곳곳에서 ‘오픈런(매장이 열리자 마자 뛰어 들어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경제적 불황 등으로 물리적 소유에 한계를 느끼다 보니 경험을 소유하려는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품질을 따지기 보다 오픈런을 통해 얻는 성취감, 희소성의 가치를 더욱 크게 느끼기 때문”이라며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국내와 해외 외식 시장의 트렌드 차이가 좁혀졌다는 점도 특징적인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 밖에 소비자에게 다양한 미식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특화 매장이나 다양한 브랜드, 지역 맛집, 인기 캐릭터와의 컬래버레이션도 올해 주목할 만한 트렌드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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