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좋아하는 웹툰, 죽도록 그리다 아프지 말라고
[6411의 목소리][6411의 목소리]
노이정ㅣ웹툰 작가
마감 지옥, 번아웃 증후군, 공황장애, 암 투병…. 펜촉에 잉크를 찍어 아날로그 방식으로 작업하던 만화 작가 시절 익숙했던 병명들은 액정 태블릿에 클립스튜디오로 그림을 그리는 지금도 스토커처럼 무섭게 따라다닌다. 그녀는 기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민에 빠진다.
새끼손가락이 저릿하다. 오늘도 그녀는 저리는 팔을 부여잡고 잠에서 깼다. 40대 후반부터 생긴 유착성 관절낭염(일명 오십견)으로 이런 증상이 자주 나타난다. 통증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2년 전 오른쪽 어깨부터 시작된 통증은 이제 왼쪽 어깨로 넘어와 그녀를 괴롭힌다. 병원에 다녀도 그때뿐이고 어깨를 무리하게 쓰지 말라는 당부만 반복해서 들었다. 하지만 어깨를 쓰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녀는 웹툰 작가다. 웹툰계에 흔하지 않은 50대 중년 작가다. 8년 동안 눈물겹게 공부한 끝에 1999년 순정만화 작가로 데뷔했고, 출판 단행본 만화를 10년간 그렸다. 육아로 6년 경력 단절을 겪었는데, 그동안 출판 단행본 시장은 웹툰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바뀌었다. 만화 작가에서 웹툰 작가로 변신(?)하기 위해 눈물겹게 노력해야 했다.
어깨 통증은 한류 아이돌과 웹툰의 만남이라는 콘셉트의 웹툰에 그림 작가로 참여하던 무렵 시작됐다. 어느 병이나 그렇듯 통증은 별스럽지 않게 시작됐고 큰일 아닐 거라 생각했다. 매일 12시간 이상씩 몇달 동안 쉬지 않고 일해도 실컷 자고 나면 아무렇지 않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었다.
그러나 통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팔을 올릴 수도, 뒤로 돌릴 수도 없을 지경이 됐다. 욱신거리는 통증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아픈 팔에 쥐가 나면 남은 팔로 마사지를 했다. 병원과 한의원을 끊임없이 들락거렸지만, 오십견의 흔한 증상이니 무리하게 팔을 쓰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통증을 참으며 오른쪽 팔을 액정 태블릿에 억지로 올려 밀어붙이고 돌아가지도 않는 팔목을 저어 가며 그림을 그렸다. 통증과 불면으로 입맛이 없어지면서 순식간에 7㎏이 빠졌다. 머리칼도 뭉텅뭉텅 빠지더니 반밖에 남지 않았고 알 수 없는 피부병도 생겼다.
1년쯤 지나서야 통증은 잦아들었고, 어깨를 돌릴 때마다 우두둑 소리는 나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는 시작했던 웹툰을 완결했고 새 작품을 계약했다. 매일 오십견에 좋다는 스트레칭을 하며 다시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신작을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왼쪽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예전과 같은 병명을 들었다. 빠른 치료와 꾸준한 스트레칭, 그리고 무리하지 않고 일한 덕분에 예전처럼 고통의 시간으로 빠져들진 않았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면 수입이 줄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작품 오픈 전이라 마감을 미룰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어김없이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피가 통하지 않는 손가락은 콕콕 쑤신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매일 12시간 이상 죽도록 일하던 30대 시절을 떠올린다. 이 통증은 그때부터 예견된 게 아닐까.
핸드폰 벨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통화한다. 그녀처럼 힘들게 살아남아 웹툰 적응에 성공한 동료 작가다. 흑백 단행본 만화를 할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어느새 20년 지기인 동료는 1년 넘게 연재하던 작품을 완결하고, 새 작품이 들어가기 전에 병원 치료받으러 다닌다고 힘없이 웃는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허리와 엉덩이, 손목 등 아픈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건강하게 살아남으라는 당부로 통화를 마쳤다. 통화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얼마 전 보았던 30대 유명 웹툰 작가 사망 기사와 마감을 미뤄 주지 않아 유산한 어느 작가의 폭로가 떠오른다.
그녀는 웹툰 작가의 실태를 검색해 본다. 마감 지옥, 번아웃 증후군, 공황장애, 암 투병…. 펜촉에 잉크를 찍어 아날로그 방식으로 작업하던 만화 작가 시절 익숙했던 병명들은 액정 태블릿에 클립스튜디오로 그림을 그리는 지금도 스토커처럼 무섭게 따라다닌다.
화상 수업을 위해 줌을 켜는 그녀. 그동안 웹툰 작가 지망생들의 멘토가 돼 6개월을 가르쳤다. 오늘은 마지막 수업이다. 그래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꾸준히 운동하고, 좋은 음식 먹으라고. 죽도록 그리다 아프지 말라고. 그러나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못 한다. 이 일이 나이 들어서까지 할 만큼 괜찮은 노동인지, 건강과 젊음을 바쳐가며 평생을 일했건만 왜 경제적 형편은 데뷔 시절과 별 차이가 없는지…. ‘건강이 최고’라는 말속에 담긴 뜻을 멘티들이 이해했을까.
수업을 마친 그녀의 얼굴은 어둑해진 하늘처럼 무거워 보인다. 결심한 듯 책상에 작은 천을 펼치고 그림이 그려진 카드 뭉치를 꺼낸다. 고민하던 질문을 타로카드에 물어보기로 한다. 진지하게 카드를 섞고 부채처럼 펼친다. 배열법에 맞춰 카드를 한장씩 뽑으며 중얼거린다. 계속 만화를 그려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묻고 또 묻는다. 결과를 보기 위해 카드를 뒤집는 그녀의 손가락이 떨린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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