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통공사 역장 출신, 자회사에서 청소노동자 성추행
‘미투’는 젊은 여성만 겪는 일이라 생각했다. 60살이 훌쩍 넘어 직장 내 성범죄의 타겟이 될 줄은 몰랐다. 지하철 청소노동자 ㄱ씨는 “나같은 ‘아줌마’가 그런 일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말했다. 사회적 시선도 두려웠다. 목소리를 내기까지 1년6개월이 걸린 이유다. 미투를 결심한 건 같은 일을 또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담당 구역이 곧 바뀌는데 거기도 남자 팀장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까 숨이 턱턱 막혔어요. 또 그런 일을 당하면 어떡하냐는 생각에 피해 사실을 알리기로 했어요.”
ㄱ씨는 서울교통공사 자회사인 서울메트로환경 소속 청소노동자다. 지난 2021년부터 서울 지하철 2호선의 한 역에서 청소를 담당했다. ㄱ씨는 지난 16일 〈한겨레〉와 만나 청소노동자를 관리하는 팀장 이아무개(64)씨로부터 3차례 성추행을 당한 사실을 털어놨다. 2021년 4∼5월께 이씨가 있는 휴게실에 들어와 ㄱ씨의 신체 부위를 만지는 등의 성추행을 했다는 게 ㄱ씨의 주장이다. 혼자 끙끙 앓던 중 피해자가 혼자가 아니란 사실도 알게 됐다. ㄱ씨는 “같은 역사에서 일했거나 일하는 청소노동자 3명로부터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가해자인 이씨는 서울교통공사 역장 출신으로, 본사 퇴직 뒤 자회사인 서울메트로환경에서 청소노동자의 근태를 관리하고 업무를 배정하는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16일, ㄱ씨가 성추행 사실을 문제 삼자 이씨는 처음엔 사과했다고 한다. ㄱ씨는 “피해 사실을 들은 아들이 이씨에게 전화 걸어 따졌더니 이씨가 ‘한 명 한 명 찾아가 무릎 꿇고 사과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다음날 이씨는 ‘화해’하고 싶다며 ㄱ씨가 있는 휴게실을 찾아왔고, ㄱ씨는 이씨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올까봐 문을 박차고 뛰쳐 나갔다.
“화장실로 가면 따라올 것 같아서 역무실로 뛰어갔어요. 직원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 ‘말 못해요. 말 못해요…’ 그 말만 계속 했어요. (성추행 당한 걸) 사람들이 알까봐 남사스러워서….”
다음날인 18일 회사가 조사에 나서면서, 이씨의 태도는 180도 돌변했다. 이씨는 회사 조사에서 ‘그런 일 없었다’ ‘내가 그렇게 했다는 증거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ㄱ씨에 피해 사실을 고백했던 동료들도 입장을 바꿨다. ㄱ씨는 “‘(성추행을 당했다고) 창피해서 어떻게 말하냐. 조용히 살고 싶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다만, 피해자 중 한 명인 ㄴ씨는 회사 조사에서 ‘이씨로부터 두 차례 성추행을 당한 뒤 사과를 받은 적 있다’는 취지로 증언하고 경찰에도 같은 내용의 진술서를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회사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쪽은 “회사가 ‘조사 결과 양쪽 주장이 다르다”며 “회사는 이 이상 수사할 권한이 없다.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온 뒤 징계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ㄱ씨에게 통보했다. 앞으로 사건 조사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미였다. 회사는 ㄱ씨가 원치 않는데도 경찰 신고를 강행하기도 했다. ㄱ씨는 “경찰 조사가 길어져서 이씨가 징계를 받지 않고 퇴직할까봐 경찰 신고 반대 의사를 사쪽에 밝혔는데 왜 신고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사쪽은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방지법)에 따라 수사기관에 신고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성폭력방지법 제9조는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공공단체의 장 등은 기관 또는 단체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된 때에는 즉시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는 ‘피해자의 명시적인 반대의견이 없을 때’라는 예외 조건이 명시돼있다. ㄱ씨를 돕는 민주노총 여성연맹 전국민주여성노동조합은 “사쪽이 경찰 수사를 핑계로 사건을 방관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사건을 조사 중인 경찰은 이씨를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서울교통공사 출신의 인사가 퇴직 후 자회사나 용역업체에 입사해 성적 괴롭힘 등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지만 서울교통공사는 뒷짐만 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앞서 지난해 4월에도 서울지하철 9호선 2·3단계(신논현∼중앙보훈병원) 역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이 본사 출신의 중간관리자에게 3년간 성추행에 시달렸다고 알린 바 있다. 다만 수사기관은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했다. 이와 관련해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본사 출신이긴 하지만 지금은 우리 소속이 아니다. 따로 드릴 말씀 없다”고 했다.
이찬배 전국민주여성노동조합 위원장은 “서울교통공사 출신 인사들이 자회사 등에 쉽게 취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있고, 그 사람들이 내려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반복된다면 본사에도 도의적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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