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살고자 하나 살 길이 없네", 100년 전 조선의 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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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민이란 '마음이 답답하여 괴로워함'을 말한다.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 번민이 없던 때가 어디 있었으랴마는, 100년 전 우리 조상들에게 어떤 번민이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그 번민은 지금은 사라졌을까? 100년 전 번민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떠나본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번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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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동아일보, 조선과 조선인의 번민 10회연속 게재 1회 '최린'편…편당 싸움 등 단결에 방해되는 요소 경계 8회 한용운 "정신 활동으로 무한한 번민을 제하자" 강조 자각있는 운동·종교적 치유·부채 노예의 탈피 등도 담아
번민이란 '마음이 답답하여 괴로워함'을 말한다.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 번민이 없던 때가 어디 있었으랴마는, 100년 전 우리 조상들에게 어떤 번민이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그 번민은 지금은 사라졌을까? 100년 전 번민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떠나본다.
1923년 계해(癸亥)년을 맞아 동아일보는 사회 각 명사가 쓴 '조선과 조선인의 번민'이란 글을 10회 연속 게재했다. 1회는 최린(崔麟)이다. 그는 편당(偏黨) 싸움하는 것이 큰 걱정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로 충돌이 있어서 외인(外人)에게도 창피스럽고 또 우리 일도 방해가 되는 일이 많은데 아무쪼록 서로 양보하고 손목을 마주 잡고 나가지 아니하면 아니되겠으니, 우리는 이 주견(主見) 아래에 서로 단결하여 일을 충실히 하여 사업을 발달시키는 동시에 초등 교육과 여자 교육을 힘써 나가게 하면 우리의 번민이 해결될 날이 있을 줄 압니다." (1923년 1월 1일자)
2회는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李承薰)이다. 그는 조선 사람에게 참다운 번민이 없다고 질타했다. "내가 감옥에서 나온 후 1초라도 내 집안일을 위하여 쓰려하지 아니하고 사회를 위하여 돌아다니며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어놓고 돈 없는 사람은 몸이라도 내어 놓으라 하여도 이 말에 응하는 사람이 없으니, 자연 쏟아지는 것은 눈물 밖에 없습니다. 만사(萬事)는 사람이 하기에 있는 것이니까 다만 기도만 해서는 소용이 없으니, 사람이 나서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정성을 들여서 뿌린 교육이나 산업의 씨가 자라서 거두어 드리는 날에는 우리의 번민이 없어질 것이올시다." (1923년 1월 3일자)
3회는 개벽(開闢) 주간을 맡고 있는 김기전이다. 그는 자각(自覺)이 없는 운동은 허사라고 강조했다. "조선 사람이 하는 일은 무슨 일을 시작해 놓은 후에 그 이름은 크고 그 떠드는 형세는 굉장하나 그 이름 안에 담긴 실상 기분이나 내용이 그 이름과 바깥 체면을 지배해 가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참뜻을 서로 나누어 손목을 마주 잡고 나갈 사람이 없는 것이올시다. 모두 서로 속으로는 반목(反目)을 하고 만나면 겉으로 교제 수단으로 허허 웃을 뿐이올시다. 바로 이것이 큰 고통이올시다." (1923년 1월 4일자)
4회는 중앙고보 교장 현상윤(玄相允)이다. 그는 살고자 하나 살 길이 없다면서 종교의 힘을 빌리자고 했다. "낡은 것은 썩었다 하여 버립니다. 그러나 새 것이 없으니 번민이외다. 지내온 방식은 틀렸다 하여 끊어 버립니다. 그러나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아니 하니 고통이외다. 이것이 방금 일반 우리가 느끼는 과도기(過渡期)의 번민이외다. 자연히 교육이라는 방편으로 일반의 속을 헤치고 머리를 산뜻하게 하는 동시에 한 쪽으로는 종교의 힘을 빌어 얼크러진 영(靈)을 인도하여야 하겠습니다." (1923년 1월 5일자)
5회는 경성도서관장 이범승(李範昇)이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세 가지 번민을 소개했다. "첫째로는 조선 사람이 착안점(着眼點)을 넓게 두지 못하는 것이외다. 둘째로는 조선 사람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외다. 셋째로는 모든 고통을 참고 끝까지 노력하지 못하는 것이외다. 바위 아래 눌린 풀도 봄이 오면 싹이 나고 잎이 돋고 꽃이 피더이다. 우리에게 여러가지 곤란과 난관이 있다 할지라도 시종(始終)이 여일(如一)하게 애만 쓰면, 나중은 성취할 날이 있겠지요." (1923년 1월 6일자)
6회는 휘문고보 교장 임경재(任璟宰)다. 암흑뿐인 조선의 현실을 토로했다. "우리 사회는 가난합니다. 그러니까 싸움이 일어납니다. 서로 밀치고 서로 짓밟고 하게 됩니다. 내 주장이 옳다고 다툽니다. 네 주장이 그르다고 싸웁니다. 많지 못한 돈으로 싸우고 넉넉지 못한 지식으로 겨룹니다. 이리하여 고통에 고통을 더 하고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게 됩니다. 상하(上下)가 모여 너와 내가 뜻을 뭉치고 발길을 같이 하여 충량(忠亮)한 뜻과 정선된 마음으로 우리의 길을 개혁하여야 웃음과 즐거움을 맛볼 것이외다." (1923년 1월 7일자)
7회는 중앙기독교 청년회의 김일선(金一善)이다. 그는 불합(不合)과 반목(反目)을 번민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화합하지 못하는 번민이외다. 다시 말하면 서로 등을 지는 번민이외다. 조선 사람의 번민은 화합하지 못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사람으로 어느 정도까지 그 번민의 지경을 떠나 조금 즐겁고 평안한 천지를 보려면 화합하여야 되리라고 나는 단언합니다." (1923년 1월 8일자)
8회는 한용운(韓龍雲)이다. 그는 번민과 고통은 밖에서 오는 것이라며 정신 활동으로 번민을 제(除)하자고 촉구했다. "조선 사람이 정신상으로나 물질상으로나 무한한 고통을 받음은 사실이외다. 남다른 설움과 남다른 고통으로 울고 불고하는 터이외다. 근본적으로 이 고통의 탈 가운데서 뛰어나와 쾌락하게 평화롭게 영적(靈的) 활동을 계속해 가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외다. 고통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외다." (1923년 1월 10일자)
9회는 민족사학자인 보성고보 교사 황의돈(黃義敦)이다. 그는 소유·권리·명예에서 번민이 발생한다고 했다. "'어리'라는 것은 소유사상(所有思想)과 권리사상(權利思想)과 명예사상(名譽思想)이란 세 가지를 말함이외다. 우리는 적어도 그 소유사상, 권리사상, 명예사상으로 된 그 '어리'를 힘있게 깨치고 그 속에서 뛰어 나와야 근본적 번민을 해결할 수가 있으며, 따라서 자유와 평등의 생명이 흐르고 사랑과 안락의 꽃이 피는 넓은 천지를 보게 될 것이외다." (1923년 1월 11일자)
10회는 민우회(民友會)의 설태희(薛泰熙)다. 그는 부채(負債)의 노예가 되지말자고 촉구했다. "우리의 번민을 없앨 방법과 수단이 여러 가지라 하겠지요마는, 가장 적극적이며 가장 적절한 방법은 '남의 빚을 쓰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이라고 나는 감히 크게 소리를 치려 합니다." (1923년 1월 12일자)
100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번민이다. 선진국이 됐어도 현실은 민망하다. 100년쯤 후에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 아니라 백년가청(百年可淸)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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