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은 지옥이야, 남극은 북극에 비하면 봄이야 봄”

정병선 기자 2023. 1. 1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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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점 도달 여성 산악인 김영미 자극한 故 박영석 대장의 한마디

“북극은 지옥이야, 북극에 비하면 남극은 봄이야! 봄!”

고(故) 박영석 대장이 후배인 여성 산악인 김영미씨에게 북극 원정 무용담을 들려줄 때 한 말이다. 김씨는 이번 원정 중 박 대장의 말을 되새기고 되새겼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17일 아시아 여성 최초 남위 90도 남극점에 도달한 김영미씨가 평소 생각하는 두명의 산악인이 있다. 박 대장과 고(故) 김창호 대장이다. 지난 2011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원정 도중 사망한 박영석 대장과는 등반이라는 수직의 세계를 경험했고, 지난 2017년 히말라야 다울라기리 원정 중 사망한 김창호 대장과는 100일 동안 유라시아자전거 횡단을 통해 수평의 세계를 경험하며 우정을 쌓았다.

김씨에게 두 사람은 지독할 정도의 열정 넘치는 산악인으로 기억이 박혔다. 박 대장은 3극점(남·북극·에베레스트)과 7대륙 최고봉, 히말라야 14좌 완등자로, 김 대장은 히말라야 14좌를 무산소 등정한 뚝심 있고 다부진 산악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김영미씨가 푼타아레나스에서 10여일 준비끝에 작년 11월21일 유니언 빙하에 도착한 모습. 이곳에서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출발 지점인 허큘레스 인렛까지 30분 거리인데 안개 때문에 경사도 파악이 힘들어 착륙이 어려운 상태라며 안타까워 했다. 그는날씨를 기다리는 동안 썰매에 짐을 패킹하고, 텐트도 치고 걷고, 썰매도 끌어 보며 남극의 눈맛을 체크 했다. /김영미씨 페이스북

박 대장과 김 대장은 산악인으로서 목표인 히말라야 14좌 등정을 한 뒤에도 끝없이 도전했다. 남들이 가지 않는 루트를 개척하는 이른바 코리안루트 개척에 나섰다가 히말라야에서 변을 당했다.

김영미씨는 이들을 통해 단순한 도전보다는 남극 단독 원정이라는 목숨을 건 사투를 선택했다. 김영미씨는 이번 남극 원정에 2003년 박영석 대장의 남극점 원정 루트 일지를 챙겨갔다. 사실 김영미씨의 루트도 박 대장의 루트와 같았다. 하지만 박 대장은 혼자가 아닌 팀이었고 김씨는 혼자였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와 세계 7대 대륙 최고봉, 지구 3극점을 모두 밟고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영석(사진) 대장. 북극 원정 당시영하 50도까지 표시할 수 있는 온도계마저 얼어버린 혹한 속에서 콧김이 얼어 코에 고드름이 맺혔다. /조선일보DB

김영미씨는 하루 일정을 마치고 텐트안에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고 했다. 너무 추워 죽을 고생한 날 텐트안에서 박 대장의 루트를 들여다 보았다.

작년 12월 23일 남위 84도에서다. 그는 “박 대장과 내가 가는 길이 같다. 그때의 운행 좌표를 구해와서 하루씩 비교하며 그 길들을 상상해 본다. 오늘까지 그 팀이 나를 10km 앞선다. 그때가 19년 전(2022년 12월)이라니 믿을 수 없고, 박 대장님도 나보다 2살이나 젊었다니 놀랍다. 이곳은 시간과 공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했다.

김영미씨는 3극점과 7대륙 최고봉, 14좌 완등이라는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박영석 대장의 단골 무용담 중 하나가 바로 북극이라고 했다.

박 대장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북극이야”라는 말을 평생 머리에 담고 있었다. 북극을 경험하지 않은 김씨로선 상상하기 힘든 것이 북극의 날씨였다. 그 때문에 남극이 선제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김영미씨는 “글쎄, 대장님은 북극에 비하면 남극은 봄이라고 했는데 (남극은) 왜이리 춥지? 북극은 도대체 얼마나 추운거야?”라며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가 남극점을 향해 걸으며 고도가 조금씩 높아지면서 가장 추운 3일을 맞은 순간이었다.

김영미씨(오른쪽 둘째)가 2014년 엄홍길휴먼재단 도전상 수상 당시 김창호(왼쪽 둘째) 대장이 축하하고 있다. /정병선 기자

지난 7일 운행 40일 차엔 김영미씨가 위기를 넘어 극한 상황에 처한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이제 눈도 지겹고, 춥고 고통스럽다. 계속 눈이 내린다. 오늘은 스키가 안밀려서 부츠를 신고 걸었다. 다리에 힘이 없다. 11시간을 걸었는데 24.3km 밖에 못 걸었다. 허벅지가 얇아졌다. 근육을 태우고 있는 중인듯 하다. 어제는 2400m의 고도라 그런지 바람도 불고 걷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아 이러다 혼자 쓰러지겠다 싶어 곧장 텐트를 쳤다”고 했다.

김영미가 새해 혹한과 화이트 아웃(눈이 많이 내려 반사돼 사방을 분간하기 힘든 현상)을 이겨내고 1월 16일(현지시각) 원정 51일째 마지막 날 영하31도 의 혹한을 뚷고 27.43km를 걸어 오후 8시 55분 남위 90도에 도달한 순간 전체 누적 거리는 1186.5km였다.

그 순간 그에게 박 대장과 김 대장의 모습이 가장 떠올랐을 것이다. 가장 위로 받고 축하받고 싶은 산악인도 둘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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