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겨울가뭄에 … 호남·나주평야 '저수지에서 생긴 일'
지난 16일 찾은 전남 나주시 노안면 소재 노안1저수지. 아래쪽에 있는 장성천에서 양수기를 활용해 저수지로 물을 끌어다 채우고 있었다. 물은 직경 20㎝ 호스를 타고 1.3㎞나 이동해 온다. 이 저수지는 최대 55만t의 물을 담아놓을 수 있는 중형급 저수지로 인근 30만평 논에 물을 대는 곳이다. 통상적으로 연초에는 저수율이 80%까지 올라와 있어야 했지만 올해는 47.2%에 불과했다. 이 상태로는 올봄 모내기 철에 물 부족 사태가 빚어질 것이 거의 확실한 수준이다. 최악의 경우 모내기를 하지 못해 벼농사를 포기하고 다른 작물을 심어야 할지도 모른다. 농업용수 관리를 맡고 있는 한국농어촌공사에 비상이 걸린 이유다. 다행히 장성천에서 물을 끌어와 하루 3000t씩 보충한 덕분에 지금은 저수율이 56.6%까지 올라갔다.
양수기로 하천 물을 끌어오는 것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지만 그 방법 말고는 저수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묘안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이제라도 눈이나 비가 많이 내려주는 것이지만 겨울 가뭄이 언제쯤 해소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하늘을 향해 기우제라도 지내고 싶은 것이 담당 직원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 가뭄 탓 전남북 저수지 저수율 50%
전남북 지역의 가뭄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가뭄이 전국적이지 않고 국지적으로 나타나다 보니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할 뿐이다. 전남북의 겨울 가뭄이 어느 정도인지는 몇 가지 숫자로 확인된다. 우선 최근 6개월간(작년 7월 13일~올해 1월 12일) 전국의 평균 누적강수량은 762㎜로 평년(746㎜)보다 오히려 조금 더 많았다. 그런데 지역별로 편차가 커서 같은 기간 경기도와 강원도, 충남북의 누적강수량은 평년 대비 115~148%에 달했다. 이에 비해 전남과 전북의 같은 기간 누적강수량은 평년 대비 각각 76%와 80%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농업용 저수지의 저수율도 경기와 강원, 충남북은 88~95%로 높지만 전남북은 각각 47%와 54%로 매우 낮다. 저수율의 평년 대비 비율도 경기·강원·충남북은 109~117%에 달하지만 전남북은 75%에 그친다.
문제는 전남북이 우리나라 전체 쌀 생산량 가운데 36%를 차지하는 최대 곡창지대라는 점이다. 겨울 가뭄이 지속돼 이번 봄까지 저수지 수위를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하면 벼농사에 큰 문제가 생긴다. 논에서 재배하는 벼는 5~6월 모내기 때 물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벼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에 물 대기다. 그 핵심적인 수단이 바로 저수지다. 농업용 저수지는 추수가 끝난 뒤 이듬해 봄까지 저수율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한다. 모내기를 할 때 가장 많은 물을 필요로 하지만 자연 강우로는 물이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모내기 때 저수지 물을 왕창 쓰기 때문에 이후에는 저수지 수위가 큰 폭으로 낮아진다. 모내기가 끝나고 여름이 오면 다시 저수지에 물을 채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많은 물을 대야 하는 늦여름과 초가을에 저수지 물을 논으로 흘려보내 벼를 여물게 한다. 이때 저수지 수위가 또 낮아지기 때문에 추수 이후부터 이듬해 봄까지 다시 저수지에 물을 채워서 모내기에 쓰는 것이 전형적인 벼농사의 물 대기 방식이다.
박진현 농어촌공사 통합물관리추진단장은 "봄철 모내기 때부터 가을철 수확 때까지 벼가 자라는 기간은 대략 120일 전후"라며 "이 기간 중 논에 필요한 용수가 대략 1500㎜라고 한다면 그중 800㎜ 정도는 자연 강우로 해결하고 나머지 700㎜는 저수지 물을 활용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박 단장은 "따라서 봄철 모내기 직전까지 저수지 수위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전남북에서 지금과 같은 겨울 가뭄이 지속되면 상당수 논에서 모내기 때 용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 가뭄에도 벼농사 끄떡없게 만드는 저수지
우리 농민들에게 논에 물 대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동학농민운동을 촉발했던 탐관오리 조병갑의 만석보 사건을 떠올리면 쉽다. 19세기 말 전북의 옛 고부군(정읍·부안에 통합) 군수 조병갑은 이미 농민들이 동진강 상류에 자체적으로 설치한 보(저수지)가 있었음에도 하류에 추가로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들었다. 저수지 축조 명목으로 세금을 많이 걷고, 건설 인부로 농민들을 징발해 큰 원성을 샀다. 조병갑은 당초 첫해만큼은 농민들에게 물세를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를 어기고 강제 징수에 나서자 분개한 농민들이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 민란을 일으킨 것이 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이 됐다. 만석보 사건은 우리나라의 주곡인 쌀을 생산하기 위해 저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저수지가 우리나라에 1만7147개가 있다. 이 중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3400개를 공공기관인 농어촌공사가 관리하고 있고, 나머지 1만3747개를 시군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고 있다. 저수지 숫자가 1만7000여 개에 달한다는 것은 전국 농촌 마을 2곳당 최소 저수지 1개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처럼 벼농사가 전체 경작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수도작 국가에서는 가뭄 대책으로 저수지가 가장 중요하다. 최진용 서울대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는 "가뭄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가뭄이 아니다"며 "기상학적 가뭄과 농업적 가뭄이 완전히 다른 게 바로 저수지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봄과 여름에 비가 안 내려서 기상학적으로 가뭄일 때에도 저수지에 채워놓은 물이 충분하다면 논에 물을 공급할 수 있어 오히려 작황이 좋은 경우가 많다"며 "비가 안 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일조량이 많았다는 뜻이어서 벼가 훨씬 더 잘 여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상학적 가뭄이 닥친다 해도 저수지를 잘 활용하면 농업적 가뭄은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말이다.
◆ 50년 넘은 저수지가 전체의 86% 달해
벼농사 위주인 우리나라에서 농업용수라고 하면 그건 저수지에 기반한 벼농사용 용수를 뜻한다. 이 때문에 겨울 가뭄이 닥칠 때마다 농업용 저수지의 중요성이 부각되지만 딱 그때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위기만 넘기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저수지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다. 그러는 사이 저수지 노후화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지만 대책은 미흡하다.
농어촌공사에 따르면 국내 1만7000여 개 전체 저수지 중 85.7%가 만들어진 지 50년이 넘었다. 30년 미만의 비교적 최신 저수지 비중은 3.6%에 그친다. 그럴 만한 것이 우리나라에 현대적 개념의 저수지가 처음 건설된 게 일제강점기 때부터기 때문이다. 일제는 당시 한반도의 쌀을 약탈해 가기 위해 천수답을 줄여 벼농사 생산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고, 그 수단으로 저수지를 늘렸다. 이후 저수지가 본격적으로 확대된 것은 이른바 '밀가루 저수지' 건설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밀가루 저수지는 6·25전쟁 직후 농업시설을 재건할 때 인부로 동원된 농민들에게 품삯 대신 미국의 원조 밀가루를 제공했던 것에서 붙은 이름이다. 당시 시공업자들이 밀가루를 빼돌리는 일도 있어 부실공사를 상징하는 말로 '밀가루 공사'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정재 서울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에는 낡고 오래된 저수지가 많아 재해가 닥칠 때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곳이 적지 않을 것"이라며 "저수지는 한번 만들어놓으면 영원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도로와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유지·보수·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논 면적 83만㏊ 중 여전히 수리시설이 없는 논은 14만3000㏊로 그 비중이 무려 17%에 달한다. 수리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나머지 83%의 논이라고 전부 가뭄에 안전한 것도 아니다. 10년 빈도 가뭄에도 용수 공급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수리시설을 갖춘 이른바 '수리안전답'만 놓고 보면 52만㏊로 전체 논의 62.7%에 그치고 있다. 우리나라가 농지기반정비사업을 오랫동안 진행해왔음에도 아직까지 가뭄에 취약한 논이 전체의 37.3%에 달한다는 뜻이다.
◆ 밭농사에도 농업용수 관리 개념 도입해야
최근 들어서는 농업용수 관리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해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벼농사에서만 농업용수 관리를 신경 쓰면 됐지만 쌀이 남아돌면서 과거 논이었던 곳에서 밭 작물을 재배하는 사례가 늘어나 밭농사 용수 관리도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더구나 전남북을 포함한 남부지방에서 추수가 끝난 뒤 월동 작물을 재배하는 사례가 많이 늘어난 것도 농업용수 공급의 부담을 늘리고 있다.
과거에는 벼 추수가 끝나면 이듬해 봄에 모내기를 할 때까지 농사라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겨울철엔 농업용수 관리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벼농사 외에 밭농사가 늘어난 데다 농가 소득에서 밭 작물 비중도 커지면서 이른바 '365일 농업용수 관리'가 필요해진 것이다.
문제는 경지 정리가 잘된 논과 달리 밭은 도로와 용수공급 시설 등 기반이 정비된 면적이 전체 밭 74만㏊ 중 12만6000㏊로 17%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밭에서 기반 정비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논에 비해 물 사용량이 3분의 1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용수 관리를 하지 않고도 충분히 재배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논은 대개 저수지를 활용하기 좋은 곳이나 하천변 등 주로 낮은 곳에 조성된 반면 밭은 그에 비해 고지대에 위치하게 된 것도 그런 배경이다.
밭은 자연 강우에 의존하는 만큼 기반 정비가 필요하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밭에 대한 기반정비사업이 시작됐지만 그 속도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박 단장은 "밭 기반정비사업도 처음에는 논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가 관할했지만 2005년부터는 시군 지자체 관할로 넘어가 예산 부족 등 때문에 빠르게 진척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제는 벼농사만이 아니라 밭 가뭄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배추와 무, 마늘, 양파, 시금치, 감자 등을 월동 재배하는 남부지방에서는 밭 가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작황이 갑자기 악화되는 문제가 종종 발생한다. 최 교수는 "김치 재료와 양념에 사용되는 채소류는 가격 폭등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해 시장에 충격을 주는 일이 자주 있다"며 "그 원인을 따져보면 가뭄으로 용수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작황이 나빠져 생산량이 급감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결과적으로 가뭄에 얼마나 잘 대처하는지가 주요 채소류 가격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열쇠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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