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은 잊어라 … 2등급 와인 가격 반열 오른 '5등급의 반란'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의 와인 이야기]
"가격과 와인 품질(맛)은 비례할까요. 비싼 와인이 더 맛이 있나요."
와이너리 오너를 인터뷰할 때 소위 '커브볼'(난처한 질문)을 한두 개씩 던집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샤토 랭쉬 바쥬(Chateau Lynch Bages)' 소유주 장 샤를 카즈(Jean Charlees Cazes) 대표에게 물어본 질문입니다. 왜 이 질문을 던졌냐 하면 장 샤를 카즈는 샤토 랭쉬 바쥬뿐 아니라 '샤토 오 바타예'(Chateau Haut Batailley)도 가지고 있는데 두 개 모두 보르도 그랑 크뤼 5등급 와인입니다. 하지만 가격은 샤토 랭쉬 바쥬가 샤토 오 바타예보다 2~3배 비쌉니다.
보르도 좌안의 그랑 크뤼 등급은 1855년 처음 정해진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2등급 샤토 무통 로트칠드가 1등급으로 승급한 게 이례적인 사례입니다.
하지만 포도밭에 '등급'이 부여되는 부르고뉴와 달리 보르도 등급은 '샤토'를 따라가는데 샤토의 소유주가 바뀌고 포도밭 구성도 달라지면서 보르도 그랑 크뤼 등급과 '품질' 또는 '가격' 간에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샤토 랭쉬 바쥬입니다.
영어식으로 '샤토 린치 바주'로도 불리는 이 와인은 보르도 그랑 크뤼 분류상 5등급에 해당지만 가격은 2~3등급 수준입니다. 샤토 랭쉬 바쥬는 1등급 샤토 무통 로트칠드와 같은 보르도 메도크 포이야크(Pauillac) 지역 와인으로 '가난한 자의 무통 로트칠드'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은 가격대가 높아져 더 이상 '가난한 자의 와인'이라고 부르기 힘들어졌습니다.
같은 5등급 와인이지만 샤토 오 바타예가 10만원대 또는 그 이하인 반면 샤토 랭쉬 바쥬는 20만~30만원대로 2~3등급 와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참고로 5대 샤토로 불리는 보르도 그랑 크뤼 1등급 와인은 100만원대입니다.
카즈 대표는 "1855년 나폴레옹 3세가 등급체계를 도입할 때 당시 와인 '가격'이 등급체계의 기준이 됐다"며 "하지만 100년이 지나면서 상위 등급을 받은 와인보다 하위 등급을 받은 와인의 품질이 더 좋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어느 정도는 '맛'이 좋은 와인이 가격도 높겠지만 결국 수요, 공급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부르고뉴 와인입니다
카즈 대표는 "부르고뉴 버건디를 봐라. 물론 좋은 와인이다. 하지만 생산량이 많지 않으니 가격이 치솟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부르고뉴 와인이 보르도 와인보다 가격 상승 폭이 큰데 그 이유를 '맛'보다는 공급량에서 찾을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샤토 랭쉬 바쥬는 더욱 독특합니다. 절대적인 생산량이 부족한 부르고뉴 와인과 달리 '충분히 많은' 와인을 생산합니다.
카즈 대표는 "등급이나 비평가의 점수를 신경 쓰기보다는 양이 충분해 소비자에게 접근성이 좋고 소비자가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와인을 만들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보틀벙커' 제타플렉스점에서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열린 시음회에선 샤토 랭쉬 바쥬 2009년, 2011년, 2016년 빈티지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와인의 다른 빈티지를 비교하면서 시음하는 것을 버티컬 테이스팅(시음회)이라고 부릅니다.
이영은 보틀벙커 팀장은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보르도 그랑 크뤼 와이너리 오너가 직접 시음회를 진행하는, 흔치 않은 자리를 만들 수 있어 매우 뜻깊고 보람차다"며 "특히 샤토 랭쉬 바쥬를 빈티지별로 소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이번 행사에는 본인이 가져온 전용 잔으로 시음하는 고객도 있었고, 개인 소장 와인과 서적에 장 샤를 카즈 사인을 받는 등 이제는 일반 와인 애호가들이 와인을 즐기는 수준이 전문가 이상으로 올라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지난해 3월 뉴욕 맨해튼에서 31개 와이너리가 참가하는 부르고뉴 그랑 크뤼 버티컬 와인 테이스팅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랑 크뤼 와인을 빈티지별로 시음하면서 그랑 크뤼 수준의 부르고뉴 와인을 충분히 숙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시는 것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숙성 잠재력이 있는 보르도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말 2005년, 2010년 샤토 무통 로트칠드를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충분히 좋은 맛이었지만 5~10년 더 숙성하면 더욱더 맛 좋은 와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버티컬 테이스팅의 매력은 두 가지입니다. 같은 와인이라도 포도가 수확된 '해'(빈티지)에 따라 맛의 차이가 상당히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또 다른, 좀 더 진정한 매력은 '시간'을 맛볼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와인은 숙성 과정에서 공기와 접촉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타닌과 산도를 부드러움과 맞바꿉니다. 물론 모든 와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맛이 꺾인다'는 표현을 쓰는데요. 숙성 잠재력에 비해 지나치게 오래된 와인은 맛이 오히려 꺾여 버립니다. 와인의 힘에 비해 디캔팅을 오래 할 때도 맛이 꺾여 버립니다.
샤토 랭쉬 바쥬는 입안 가득 민트 맛이 강하게 퍼지는 게 매력적입니다. 멘톨 담배를 입안에 머금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입안이 얼얼할 정도입니다. 위스키로 치면 라가불린 정도의 느낌입니다. 2009년 빈티지도 아직까지 힘이 넘쳤습니다.
그러면 몇 년 뒤에 마셔야 가장 맛이 있을까요?
카즈 대표는 "2009년, 2016년처럼 좋았던 해의 와인에는 보르도 와인의 특징인 연필심, 흑연의 맛, 아직 야수 같은 헤비한 맛이 남아 있다"면서 "보디감이 강하고 파워풀해 10년 뒤에 마시면 더 좋아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카즈 대표 할아버지는 영빈티지 와인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카즈 대표는 "영빈티지 와인은 산이 많고 타닌이 많이 남아 있지만 디캔팅을 1~2시간 하면 맛이 훌륭해진다"며 "할아버지가 영빈티지 와인을 좋아해 지금 남아 있는 와인이 없다. 그게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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