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머니가 일깨운 카카오엔터 '업의 본질'[차준호의 썬데이IB]

2023. 1. 1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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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01월 17일 14:56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혹시 우리가 제안한 조건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당장 사우디행 비행기를 알아봐야 하는 건 아닌지 정말 초조했습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부펀드인 퍼블릭인베스트먼트(PIF)와 싱가포르 국부펀드(GIC)로부터 1조1540억원에 달하는 투자유치에 성공하며 축포를 쐈다. 한 관계자에게 투자 유치 과정에서 가장 큰 위기가 언제냐고 묻자 지난해 11월을 꼽았다. 배재현 부사장이 이끄는 카카오 투자전략실은 GIC와 투자유치 논의를 먼저 끝낸 후 이무렵 PIF에도 계약서를 전달하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PIF가 내부 투자심의위원회를 열어 답변을 주기로 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이 두절됐다. 

다행히 월드컵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투심위 전날 경기에서 사우디가 아르헨티나를 꺾자 온 국민이 축제에 빠졌고, PIF 의사결정자들도 '자체 휴가'에 돌입했다. 카카오 관계자들은 사우디가 조별 리그를 통과해 공백이 길어졌다면 거래 완주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카오엔터 사활 걸었던 투자유치

사진=카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래픽=송영 기자

카카오팀이 투자 유치를 앞두고 이렇게 초조했던 건 카카오엔터가 창사 이후 최대 위기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카카오엔터의 확장엔 거침이 없었다. 언제든 상장(IPO)에만 성공하면 기업가치 20조원을 훌쩍 넘길 수 있다는 꿈을 앞세워 유망한 기획사·제작사를 쓸어 담았다. 보유 현금이 바닥을 보였지만 언제든 외부에서 투자유치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진수 대표도 미국에 상장해 180억달러(20조원) 이상의 몸값을 증명받겠다며 외신 인터뷰에 나섰다. 지난해초 추진하던 KKR, 블랙록 등의 1조원 규모 프리IPO 협상만 마무리되면 상장과 수십조원의 몸값은 곧 현실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금리 상승으로 전세계 유동성 파티가 끝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KKR·블랙록은 막바지에 투심위 부결을 이유로 발을 뺐다. 카카오가 부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들고 찾아왔던 PEF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투자를 주저했다. 영원한 파트너일줄 알았던 카카오엔터의 2대 주주 앵커에쿼티파트너스도 투자금 회수 기일이 다가오자 사사건건 경영에 개입을 시작했다. 회사가 “이 대표가 외신에 '20조원'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며 진화에 나선 것도 이 무렵이다.

감춰져 있었던 문제들도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래디시·타파스는 기존 경영진과 카카오간 문화 차이로 인수후통합(PMI)에 난관을 겪었다. 47곳의 제작·기획사를 인수해 유재석, 이병헌, 아이유 등 스타 군단을 보유한 종합 엔터테인먼트사가 됐지만, 이들이 카카오플랫폼과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때마침 카카오 본사의 문어발 확장과 자회사 쪼개기 상장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상장 1순위 후보였던 카카오엔터에도 불똥이 튀었다. 당분간 IPO 대신 사업 안정화에 나서기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PIF·GIC, 카카오엔터는 K-컨텐츠 '원유'

그룹 아이브 /사진=스타쉽엔터테인먼트 제공

수많은 PEF로부터 거절 의사를 받아 동력이 꺼져가던 카카오엔터에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 건 지난해 6월이었다. 앵커PE의 카카오엔터 투자에 펀드 출자자(LP)로 참여해 회사를 지켜봤던 GIC의 제의로 투자 협상이 시작됐다. GIC가 PIF를 초청하면서 판이 커졌다.

PIF와 GIC는 각각 운용규모(AUM)가 6200억달러(768조원), 6900억달러(770조원)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대표 국부펀드다. 이들은 실사 과정에서 카카오엔터가 보유한 컨텐츠 본연 역량에 집중했다. 연 수익률 8%를 투자자들에 돌려줘야 하는 의무를 진 PEF와 달리 국부펀드의 투자 목적은 자국의 국부 증진에 있다. 두 국부펀드는 웹툰·웹소설(스토리)에서 드라마제작(미디어), 연예기획사 및 음원사업(뮤직)까지 하나의 플랫폼에 두고 컨텐츠를 창조하는 기업은 세계에서 카카오엔터가 유일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한국에 역량있는 K-컨텐츠들이 뿜어나올 수 있는 '유전'을 발굴하듯 긴 호흡으로 접근했다.

이들이 보인 장기적인 시각은 PEF는 물론 카카오엔터를 키워낸 카카오마저 유동성 축제 속에서 잊고 있던 업의 본질이기도 했다. 때마침 넷플릭스 등 OTT를 통해 출시한 수리남이 흥행에 성공하고 걸그룹인 아이브가 글로벌 시장에서 인지도를 쌓는 등 카카오엔터의 자회사 사업이 각광받으며 잠재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GIC와 PIF 모두 투자 과정에서 사업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투자금을 글로벌 진출을 위해 써달라는 유일한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몸값이 18조원에서 10조원까지 낮아졌지만 사라진 8조원이 카카오엔터에 남긴 교훈은 뚜렷하다. 카카오엔터의 본질은 파이낸싱이 아닌 컨텐츠에 있다는 점이다. PIF와 GIC가 1조원 이상을 투입한 배경은 투자유치 발표 이후 돌연 등장한 문체부 관료들의 역량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K컨텐츠를 창조했던 창작자들의 역량과 잠재 창작자들의 잠재력에 베팅한 것이었다. 이를 오롯이 담아야 할 플랫폼인 카카오가 또 한번 무분별한 사세 확장의 늪에 빠져 본질을 잃으면 투자자 뿐 아니라 K컨텐츠 산업 전반에 대한 배임일 수 있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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