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수고로움이 인정되지 않는 ‘엄마들’에게 건네는 인사[플랫]
엄마가 암에 걸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잘 모르겠다. 6년 만에 마주한 그는 암 투병 사실과 함께 눈앞에 나타났다. 단절을 단절하게 된 구실이 암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실 비참했다. 서른 해 전 김광석은 서른 즈음이 되면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던 것이 점점 더 멀어진다’ 고백했는데 이런 것이었을까. 뜨겁고 푸릇푸릇하기만 했던 인생의 색깔들은 신년을 맞이하며 순식간에 저버렸고, 갑작스레 저물어가는 해 질 녘의 빛깔 앞에서 혼란스러운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사전 지식 하나 없이 맞닥뜨린 노화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부탁해야만 했다. 양육자의 몫 일부가 내 몫이 되었다.
수화기 너머 선배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동행인이 진단받는 순간, 수술하는 순간은 모두 투병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절망과 위로가 한 그릇에 모두 담긴 흔치 않은 표현으로 느껴졌다.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는 희망, 갈 길이 멀다는 절망. 암과의 사투는 100m 달리기가 아니라, 42.195㎞ 마라톤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비록 병명은 다르지만 치매 걸린 <아빠의 아빠가 됐다>는 조기현 작가의 책제목 부제에 왜 9년의 기록이 삽입되었는지 처음 알 것 같았다.
진단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맡길 수 있는 문제였지만, 그 나머지 것들은 ‘엄마들’의 전적인 몫이었다. 가족들은 ‘엄마의 엄마’가 되었다. 어떻게 돌볼 것인지, 무슨 돈으로 수술비를 마련할 것인지, 어디서 치료받을 것인지, 수술 후 어떻게 항암치료 받고 식이요법을 이어갈 것인지, 한 사람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돌봄과 재정, 정보 취득은 ‘엄마들’의 과제가 되었다.
암병동 주변 의자에 앉아있으면서 수많은 엄마들을 보았다. 25만명에 달하는 1년 평균 신규 암 발생자, 과거 암 투병했던 200만 유병자 주변에는 명찰 없이 병실 의자에 앉은 채 얼굴을 구기는 ‘엄마들’이 있었다. 병실에 간혹 홀로 입원한 환자가 있을 때면, 그들은 낯선 타인의 엄마가 되면서까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다. 길고 고된 암과의 사투는 비단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호자에게도 중요한 말이었다. 암은 의학적 처치로 극복 가능한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노동에 기대는 과업이었다. 암 환자의 생존율 증가 이면에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가려진 기약 없는 돌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여태껏 몰랐었다. 암은 돌봄의 병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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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과 항암 방식은 과학적 표준화와 함께 빠르게 인정되고 있지만, 돌봄의 수고로움은 좀처럼 인정되지 않는 현실이다. 주 돌봄자들은 아직도 과일바구니를 올려놓는 간이 의자에서 쪽잠을 청해야 하고,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채 긍정회로를 끊임없이 가동해야만 했다. ‘돕기 위해 도와야 할 사람’을 향한 도움의 몫은 아직 요원하다.
열악한 환경 속, 신년을 마주하고야 만 ‘엄마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당신이 이끌어온 작년은 대단했다고. 올해는 더 잘될 것이라고. 병원 안팎에서 우연히라도 이 칼럼을 읽고 있다면 나는 당신을 맘속 깊이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올 한 해도 함께, 겨우 그리고 무사히 살아내자.
▼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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