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엉터리 문·이과 ‘통합’에 대한 내로남불식 사과
자연계열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문·이과 통합수능에 의한 ‘문과 침공’으로 절망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서남수 전 교육부 장관이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자신이 2013년에 내놓았던 문·이과 통합의 청사진에 맞는 수능 개편을 완수하지 못해서 ‘여러 문제’를 겪게 된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8년 6개월 전에 물러난 전직 장관의 늦었지만 솔직한 사과는 매우 신선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서 전 장관이 사과와 함께 내놓은 해명이 몹시 수상하다. 문·이과 구분 없이 인문사회·과학기술의 기초 소양을 갖춘 융복합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자신의 청사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2018년 7월에 불거진 숙명여고 쌍둥이 내신 조작 사건으로 정시 확대 요구가 쏟아지면서 문재인 정부가 수능 개편에 ‘정무적 판단’을 개입시킨 것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뒤늦게 끼어든 수학계의 교과 이기주의도 문제였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미적분·기하는 수능에서 절대 뺄 수 없다는 수학계의 고집을 교육부가 이겨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문·이과 통합 수능이 궤도를 이탈해서 벌어지게 된 문과 침공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수상한 해명의 핵심이다. 자신의 책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대신 문재인 정부와 수학계에게 실패의 책임을 떠넘겨버린 것이다. 내로남불과 유체이탈 화법의 유혹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더욱이 자신이 앞장서서 망쳐놓은 교육과정과 대입 제도에 대한 엉뚱한 내로남불식 비판을 담은 책까지 내놓았다고 한다. 정말 후안무치한 일이다.
● 기만적인 서남수의 문‧이과 통합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교육부 장관이었던 서남수 전 장관이 2013년 9월에 ‘문‧이과 통합’을 외쳤던 것은 사실이다. 2015년까지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을 만들고, 2021학년도부터 문·이과 통합 수능을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문·이과 통합에 대한 당시 서 장관의 인식은 놀라울 정도로 순진했다. 문·이과 구분 없이 모든 학생이 배우는 ‘통합사회·통합과학·(통합)수학’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문·이과에 따른 수능 과목의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서남수식 문·이과 통합’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서남수 장관의 문·이과 통합은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학생들에게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기초 소양을 가르치겠다는 것은 겉으로 내세운 허울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서 장관이 느닷없이 문·이과 통합을 들고 나온 것은 지극히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국가 백년대계인 교육에 ‘정무적 판단’을 개입시켜버린 것은 문재인 정부가 아닌 서 장관이 그 원조였다는 뜻이다.
박근혜 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역사 바로 세우기’가 단초였다. 청소년들이 6·25 전쟁을 ‘북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어느 언론사의 2013년 6월 여론조사가 논란의 시작이었다. ‘북쪽에서’ 부는 바람을 ‘북풍’이라고 배운 청소년들에게는 ‘북쪽에서’ 밀고 내려온 6·25를 ‘북침’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6·25가 북한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온 ‘남침’이라는 인식은 기성세대의 불합리한 인식이 오히려 청소년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 결과였다.
언론사의 어설픈 보도에 놀란 대통령이 ‘민족의 혼’과 ‘우주의 정기’를 지키기 위한 역사 교육을 강화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당장 역사 교육 바로세우기를 떠맡게 된 교육부의 입장이 난처했다. 교과 이기주의에 포획된 교육과정에서 한국사를 필수화하는 일이 절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부 꼼수 행정의 달인이었던 서남수 전 장관이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찾아낸 절묘한 출구가 바로 ‘문·이과 통합’이었다. 교육부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공계 학술단체에 ‘문·이과 통합’에 대한 의견을 묻고, 사회·과학·수학 교육 전문가들을 공휴일에 냉방도 하지 않은 어두운 장관실로 호출했다. 당시 장관의 유일한 관심은 ‘통합’ 과목만으로 구성된 ‘문·이과 통합 수능’뿐이었다.
서 장관의 선택은 실제로 절묘한 것이었다. 문·이과 통합에 대한 논란이 역사 교육 강화에 대한 잡음을 집어 삼켜버렸다. 인문사회계의 전문가들과 학부모들은 어렵고 부담스러운 과학 교육을 경계했고, 과학기술계 전문가들은 학력 저하를 걱정했다. 결국 문·이과 통합은 한국사의 필수화에 대한 반발을 에둘러 차단해버리는 가장 효과적인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략이었다.
● 엉터리 ‘짝퉁 통합’의 진실
박근혜 정부에서 완성해놓았던 ‘2015년 개정 교육과정’이 문·이과 통합의 성공 사례라는 서남수 전 장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서 전 장관이 자랑하는 ‘통합사회·통합과학·(통합)수학’은 진정한 문·이과 통합 교육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예를 들어서, 통합과학은 ‘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을 똑같은 분량으로 분배해놓은 기형적인 과목일 뿐이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배우는 통합 과목만으로는 대학입시는 물론이고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기초 소양도 가르칠 수 없다.
수능을 통합 과목으로만 한정해야 한다는 서 전 장관의 고집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과목으로 수능을 치르게 되면,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의 교육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모든 학생이 대학입시에 올인하고 있는 현실에서 학생들이 수능에 반영되지 않는 교과에 신경을 쓸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칫 통합과목 중심의 엉터리 문·이과 통합 수능을 밀어붙이면 고등학교 교육이 3년에서 1년으로 축소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통합 과목을 넘어선 심화과목의 교육은 불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대학에서도 통합 과목으로만 구성된 고등학교 교육과 엉터리 통합 수능을 용납할 수 없다. 미적분·기하를 수능에서 절대 뺄 수 없다는 주장은 수학계가 아니라 이공계 대학의 요구였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학 신입생들의 학력 저하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과외 지도를 하고 있는 대학생이 ‘사견’(私見)과 ‘사견’(邪見)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문·이과 구분 교육의 정체조차 파악을 못하면서 외치는 어설픈 ‘짝퉁 통합’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겉으로는 ‘통합’을 외치면서 돌아서서는 뜬금없이 ‘맞춤형’을 외치는 ‘고교 학점제’를 시행하겠다는 고집도 버려야 한다. 맞춤형을 핑계로 과도한 편식을 허용하는 반(反)교육적 교육과정은 아무도 용납할 수 없다. 스포츠에 뛰어난 역량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의 정상적인 교육을 면제해주는 우리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 문·이과의 진정한 ‘구분 폐지’가 필요하다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19세기 말 화혼양재(和魂洋才)를 외치던 일본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교육제도다. 일본·한국·중국·대만에서만 볼 수 있는 황당한 제도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적성과 진로를 존중해주고, 학습 부담을 줄여준다는 명분은 의미 없는 궤변일 뿐이다. 사실은 교육에 투입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반쪽짜리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꼼수가 바로 ‘문·이과 구분 교육’의 정체다.
‘문과’와 ‘이과’는 함부로 ‘통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의 ‘사회’와 ‘과학’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능의 ‘가’형과 ‘나’형을 없애는 것이 문·이과 통합일 수도 없다. ‘이공계 기피’나 ‘문과 침공’은 기형적인 낙인찍기식 ‘문·이과 구분 교육’이 만들어낸 황당한 사회문제일 뿐이다.
문·이과 구분 교육의 폐해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현실적으로 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성장기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방황의 자유’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에게 전공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일찍부터 장래 진로를 결정하라는 교육학자들의 강요는 반(反)교육적인 것이다.
문·이과 구분 교육이 학생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찍어주고 있다는 사실도 외면할 수 없는 부작용이다. 사실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생각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다. 국어·사회가 ‘문과’이고, 수학·과학이 ‘이과’라는 인식은 설득력이 없다.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야 할 학생이라면 누구나 국어·수학·사회·과학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상식을 갖춰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문과’와 ‘이과’로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은행원·경영자·국회의원·대통령에게는 이과적 소양도 문과적 소양만큼이나 중요하다. 문과 출신이라서 과학을 모른다는 변명은 몹시 부끄러운 것이다.
이제 학생들의 선택권과 학습부담 경감을 핑계로 내세우는 억지스러운 문·이과 구분의 ‘폐지’를 추구해야 한다. 이공계 진학을 위한 개념 교육 중심의 수학·과학 교육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수학 문제풀이와 어설픈 과학 개념 대신 수학적 논리와 과학의 문명적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처음 도입되었던 ‘융합과학’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에게나 필요한 과학 개념만을 가르치는 대신 현대 과학이 제시해주는 우주관·자연관·생명관을 가르치는 것이 융합과학의 목표다. 단순히 고등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개념의 범위가 아니라 교육의 내용에서부터 문·이과 구분을 철폐해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교육,에너지,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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