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위 삼옷 걸치듯… 수없는 덧칠로 완성된 ‘숨김의 美’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요즘 대세인 동영상 플랫폼을 보면, 온통 발가벗고 드러내어 시선을 끄는 게 시대 풍조인 듯싶다.
높은 덕을 낮은 자세 속에 감추기에 오히려 빼어나게 드러난다는 은수(隱秀)의 미학이 우러름을 받았다.
1940년대생부터 1970년대생까지 이르는 참여 작가들은 마음껏 화려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숨겨서 담박하게 깊이를 드러내는 화면을 지향한다.
화면 위의 플라스틱 구슬이 시선을 끄는 천광엽의 작품은 우리 재래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의 핵심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화려함보다 내면의 깊이 조명
동아시아 ‘은수의 미학’ 표현
최명영·이동엽 색 최소화시켜
박영하, 자연을 추상으로 그려
박종규 ‘노이즈-시그널’ 은유
글·사진=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요즘 대세인 동영상 플랫폼을 보면, 온통 발가벗고 드러내어 시선을 끄는 게 시대 풍조인 듯싶다. 이런 세상에서 화려한 형식은 될수록 감추고 내면의 빛을 살며시 드러내는 ‘온장(蘊藏)의 미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15명의 현대미술 작가가 참여한 ‘의금상경(衣錦尙絅)’전을 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서울 삼청동 학고재에서 18일 개막한 전시는 동양 고전 시경(詩經)에서 제목을 빌렸다. 의금상경은 중국 제나라 귀족 여성이 국혼(國婚) 행사에서 백성의 눈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능라금단의 옷 위로 삼으로 짠 홑옷을 걸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비단옷 위에 삼 옷을 걸쳤다’는 뜻이다. 전시를 기획한 미학자 이진명에 의하면, 의금상경의 미의식은 동아시아 각국에서 오랫동안 전승돼 왔다. 높은 덕을 낮은 자세 속에 감추기에 오히려 빼어나게 드러난다는 은수(隱秀)의 미학이 우러름을 받았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들에게 전통 미의식인 의금상경이 내재함을 보여준다. 1940년대생부터 1970년대생까지 이르는 참여 작가들은 마음껏 화려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숨겨서 담박하게 깊이를 드러내는 화면을 지향한다.
한국 단색화 대표 주자인 최명영과 백색 회화 대가인 이동엽의 작품들은 색을 최소화하고 정신의 힘을 응축하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화업(畵業)을 수행의 과정으로 여긴 두 작가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너머의 세상을 지향한다.
박영하는 부친인 시인 박두진이 제시해 준 ‘내일의 너’라는 화두를 주제로 삼는다. 나무, 달, 하늘, 태양, 바람을 연상시키는 자연의 구상이 마음속의 추상 이미지로 흩어지는 화면을 통해 시공간의 벽을 넘어 내일의 문을 열고자 한다.
화면 위의 플라스틱 구슬이 시선을 끄는 천광엽의 작품은 우리 재래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의 핵심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이면서 전체이고 전체이면서 다시 하나가 된다’는. 작품 속에서 하나의 구슬을 집중해서 보다가 다시 전체 화면을 바라보게 된다. 박종규 작가는 컴퓨터 위의 노이즈를 확대해 그림으로 재현했다. 무규칙, 혼란, 예측 불가의 노이즈와 규칙, 질서, 예측 가능의 시그널에 대한 사유를 이끄는 작품이다. 세상에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노이즈와 시그널은 ‘둘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二而一, 一而二)’라는 것을 은유한다.
겹회화(layered painting) 작가로 알려진 장승택은 겉으로 드러나는 주요 색(main color)으로 그 속에 숨겨진 색들을 다스린다. 수십 번을 덧칠하여 완성된 한 가지 색은 그 아래에 쌓인 색들과 경쟁과 화해를 끝없이 시도한다. 김현식 작가는 에폭시를 칼로 그어 물감을 바르고 다시 에폭시를 부어 굳혀서 칼로 긋고 물감을 바르는 과정을 반복하며 무한의 심연을 구현한 작품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유일한 중국 작가인 왕쉬예는 자연과 사물을 인간의 관점에서 대상화하지 않고 우주 존재 그 자체로 인식하는 무차별적 바라보기(無差別的觀看)를 제안한다. 왕쉬예는 일본에서 각광을 받는 작가이다. 재일 한국작가 이우환은 그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잊게 만드는 망아(忘我)의 쾌감을 선사한다.”
작품들을 찬찬히 보고 나면, 의금상경이 현대 회화의 저류(底流)에 흐르고 있다는 것에 공감하게 된다. 또한 세계에 한국 미술을 알린 단색화의 본질은 무엇인지, 단색화 이후 작가들의 정신성이 어디로 향하는지 헤아려볼 수 있다. 학고재 전시장과 온라인 뷰잉룸(OROOM)에서 동시 진행하는 전시는 2월 25일까지.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한미군 ‘재밍건’으로 사드기지 상공 정체불명 드론 격추
- 김성태, 조폭 출신으로 쌍방울 인수… 정·관·법에 문어발 인맥
- 홍준표, “건물 투기 문제 나왔다던데…자중해야” 나경원 부동산 투기 의혹 언급
- ‘얼핏 보면 외설적’ 논란 부른 마틴 루서 킹 부부 조형물
- [속보] 국정원·경찰, 민주노총 사무실 압수수색…서울간첩단 사건 관련
- 해저 1km서 시속 130km로 질주하는 러의 ‘지구종말 무기’ 첫 생산…핵 장착도 가능
- “덫에 걸렸다”…정형돈 또 교통법 위반 왜?
- 공무원 구내식당 밥값 차별?…대통령실, 국방부 절반 가격
- “이준석, 윤핵관은 당원들 성향 몰라...결선투표 가면 까무러칠 거다”
- 층간소음 신고 주민에 “죽인다” 협박한 40대…2심도 무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