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설계 탓인데… 국민 부담만 키우는 정부·정치권 [홍길용의 화식열전-국민연금②]
저출산·고령화 대책실패로 심화
선진국 정부는 공적보험료 지원
韓 공무원·군인·교사에 재정지출
기금 소진시 금융시장에도 부담
가격하락·지배구조 변화 불가피
도입한지 35년도 안돼 연금의 위기가 초래된 데는 정치권의 포퓰리즘과 정부의 무책임 탓이 크다. 애초에 하자 투성이인 제도를 만들었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어서다. 재정 건전성을 이유로 노후복지 부담은 국민에게만 지우면서 공무원·군인·교사 등 이른바 공직자들의 노후 복지에 무한대로 혈세를 투입하는 ‘도덕적 해이’까지 서슴지 않았다. 정부가 공적연금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선진국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1988년 국민연금이 처음 도입될 때는 소득의 9%를 보험료로 내면 은퇴 후 연금으로 기존 소득의 70%를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설계됐다. 애초부터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기형적 구조로 출발한 셈이다. 그나마 출범 당시에는 저출산 고령화가 심각하지 않았고 금리수준도 높아 조기 소진 가능성이 수면위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연 연금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을 품기에는 충분했다.
정부는 1960년대부터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1970년대 ‘둘 만 낳아 잘 기르자’에서 1980년대 ‘하나씩만 낳자’로 강화됐다. 사실상 인구감소 정책이다. 1983년 출산율은 2배 아래로 떨어지고 국민연금이 도입된 1988년에는 세계 최하위 수준까지 추락한다. 인구 줄이려는 정책을 펼치면서 인구 증가를 전제로 한 공적연금을 만들었던 셈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 중이다. 통계청 장래인구 추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중위연령은 2020년 43.7세에서 2070년 62.2세로 높아질 전망이다. 생산연령인구 대비 100명당 고령자 인구는 1960년 5명에서 2020년 22명으로 늘었고 2070년에는 101명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인구감소는 2년 전부터 이미 시작됐다.
국민연금은 출범 10년만인 1998년과 소득대체율을 60%로 낮추고, 2007년에는 40%까지 떨어뜨리는 대신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한다. 근본적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어 ‘개혁’이라기 보다는 ‘미봉’책에 가까웠다. 올해에도 정부는 ‘개혁’을 예고했지만 가입자 부담만 높이는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잘못된 설계를 한 정부가 어떤 재정적 노력을 해야할 지는 제대로 논의가 되지 않고 있다.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의 가장 큰 명분이 선진국 보다 낮다는 이유다. 선진국들은 우리보다 보험료율이 높지만 그 중 상당부분을 정부가 지원한다. 2019년 기준 공적연금 수입 가운데 스웨덴은 49.2%(세금 환급 포함), 독일은 23.7%가 정부 지원분이다. 일본(후생연금+국민연금)도 23%에 달한다. 룩셈부르크와 몰타는 국고 기여율이 각각 8%와 10%다.
세계 최초로 공적연금 제도를 도입한 독일은 사적연금을 활성화하기 위해 리스터(Riester) 연금을 도입했다. 가입자가 연소득의 4%를 납입하면 정부가 그 가운데 30∼90%가량을 지원한다. 소득이 적고 자녀가 많을수록 정부 지원은 늘어난다. 우리나라의 사적연금 지원제도는 연금저축 납입액의 일부를 세액공제 해주는 정도다. 그나마 아무리 많아야 연간 60만원을 넘지 못한다.
선진국들은 공적연금의 지속가능성이 어려울 때를 대비해 정부 재원으로 완충기금도 조성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보험료 지원도 거의 하지 않고 기금 소진시 재정으로 전액 보전한다는 명확한 약속도 회피하고 있다. 부족한 재원을 국고로 어느 수준까지 지원할 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조차 없다. 재정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의 연금에 천문학적 혈세 지원이 이뤄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공무원·군인·사립학교 교원들이 가입하는 특수직역연금은 기금이 고갈되면 정부가 지원하도록 돼 있다. 특수직역연금은 상대적으로 가입기간이 길어 국민연금 대비 소득대체율이 높다. 그만큼 기금 소진시 재정부담이 크다. 2022년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에 5조원이 넘는 혈세가 투입됐다. 공무원과 군인연금 가입자 1인당 726만원 꼴이다.
사학연금도 지금은 흑자지만 적자 전환은 시간문제다. 국회예산정책처 전망을 보면 이들 3개 특수직역연금의 재정수지 적자는 2030년에는 10조3000억원, 2040년에는 18조4000억원으로 불어난다. 공무원·군인 퇴직자 1인당 혈세 지원액은 2030년 1219만원, 2040년 1578만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특수직역연금과 국민연금의 기준통합을 권고하고 있다.
한편 이제는 국민연금 기금 소진이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 기금은 국내 주식과 채권을 각각 130조원, 302조원 보유하고 있다. 국내 주식의 6%와 상장채권의 10% 이상이다. 기금이 소진된다는 뜻은 보유한 국내 주식·채권도 모두 팔아 연금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뜻이다. 수급기반 붕괴에 따른 국내 금융자산의 가격하락은 물론 지배구조의 변화까지 초래할 수 있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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