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女임원만큼 귀한 여성 심사역... 그들이 본 '스타트업 남초 현상'
여성 심사역 꾸준히 늘고 있지만 14%
투자 결정권 가진 '시니어 심사역' 부족
"양적 증가보단 질적 증가가 중요"
"업계에 유명한 여성 심사역들이 몇몇 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투자 결정권을 가진 여성 심사역은 거의 본 적이 없어요."
투자 유치 활동을 벌이는 스타트업 대표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유니콘'은 기업 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기업을 일컫는다. 그러나 여성 창업자 입장에서 또다른 유니콘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해 자금을 투자하는 여성 심사역의 존재다. 들어보긴 했지만 만난 적은 없어 유니콘(일각수)이다.
투자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참급 여성 심사역은 특히나 귀하다. 지난해 10월 시니어 여성 심사역 8명이 모이는 토크쇼 행사에는 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예비창업자 등 1,000명이 넘는 사전신청자가 몰렸다. 여성 심사역은 중소벤처기업부가 창업투자회사를 대상으로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17년 87명(전체의 9.2%)에 불과했고, 지난해 기준으로도 202명(14.0%)에 그쳤다.
현업에서 뛰는 여성 심사역들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또 스타트업 투자의 칼자루를 쥔 심사역 중에 여성이 적다는 것은 실제 여성 창업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한국일보는 10일 최경희 소풍벤처스 파트너, 김메이글 크립톤 이사, 김영경 D3쥬빌리파트너스 상무 등 여성 심사역 3인방을 만나 이런 궁금함을 직접 물었다.
-여성 창업자들을 만나보면, '투자 유치 과정에서 여성 심사역을 만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의사결정권이 없는 심사역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실질적 의사결정권을 가진 여성 심사역이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영경=여성 비율이 적은 건 비단 벤처투자 영역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로 외국계 투자은행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했는데, 외국계 투자은행 업계도 2000년대에는 애널리스트 7~10명 중 여성은 한두 명뿐이었습니다. 지금 벤처캐피털(VC)업계도 2000년대 투자은행과 얼추 비슷한 것 같아요. 여성 심사역 비중이 14%면 절대적으로 적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VC 업계가 최근 몇 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해 온 점을 생각하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사실 지금부터는 여성 심사역의 양적 증가보단 질적 증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주니어 심사역들이 대다수겠지만, 점차 시니어 여성 심사역들이 많이 배출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성 심사역이 늘면 여성 창업에 대한 편견, 선입견은 많이 보완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김영경 D3쥬빌리파트너스 상무
최경희=저도 현상만 보면 14%지만, 성장 추세를 보면 단기간에 크게 증가한 게 맞다고 봅니다. 저 또한 창업자(전 '튜터링' 공동대표) 출신인데, 최근엔 창업자 출신 심사역도 많이 배출되고 있어요. 다만 여성 창업자 자체가 적다보니, 이렇게 VC업계로 건너올 수 있는 여성 심사역도 확 늘어나긴 어려운 구조죠.
김메이글=사실 의사결정권이 있는 심사역이 되려면 10년은 내다봐야 해요. 펀드를 운용하는데는 투자-관리-회수 3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3년 정도가 소요되죠. 다른 업계라면 회사 3년만 다녀도 누군가에게는 '선배' 소리를 듣고, 7년이면 어느 정도 의사결정권도 생겨요. 그런데 이제 막 VC업계에 진입하는 여성 심사역들은 최소 10년을 내다봐야 기회의 문이 열리는 겁니다. 그것도 완전 '남초'인 영역에서요.
-산업 분야에 여성이 적은 것은 VC업계의 일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유독 VC업계에 남성 중심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많을까요?
최경희=사실 심사역과 스타트업의 접점은 투자의사결정권이겠지만, 파트너급 심사역의 또 다른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출자자를 모집해 펀드를 결성하는 일이에요. 펀드의 규모가 커지고 심사역이 의사결정권이 생기면 그땐 투자 역량 외에도 출자자를 모집하는 역량이 필요해 집니다. 골프 등의 접대도 많은 것도 사실이죠.
김영경=소규모 투자사는 심사역이 보통 서너 명이고 지인들끼리 개업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굳이 여성 심사역을 끼워줄 필요성을 못 느낄 수도 있어요. 일반적인 금융 업계도 마찬가지지만, 대다수 투자사들이 프론트 오피스(투자 부문)는 남성에게 맡기고, 백 오피스(관리 부문)은 여성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죠.
김메이글=상대적으로 경력 단절이 쉽게 용인되지 않는 업종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자본을 움직이는 핵심은 신뢰이고, 신뢰는 누적돼야 하는데 여성의 경우 임신, 출산 등으로 몇년간 경력이 단절되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죠.
"가정과 학교가 변하는 게 먼저죠. 딸이 창업을 꿈꿀 때 부모와 학교가 충분히 독려할 수 있어야 해요."
최경희 소풍벤처스 파트너
-한국일보 조사 결과, 지난해 여성 창업자가 투자를 유치하는 비율은 시리즈A 단계가 7%, 시리즈B 단계가 3%에 불과했습니다. 왜 이렇게 낮은 것일까요? 여성 창업자에게 비즈니스 외적의 기준이 적용되기도 하나요?
김영경=스타트업 특성상 기술벤처가 많은 영향도 있을 겁니다. 공학자인 여성 창업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사실 대학 내 여성 공대생 비율 자체가 적죠.
최경희=저희 회사도 최근 기후테크기업에 투자했는데, 창업자의 90%가 남성이었습니다. 또 여성 창업자들은 아무래도 임신, 출산, 육아 등의 생애주기와 관련된 질문도 많이 받게 됩니다. 투자유치 활동을 할 때 임신 사실을 숨기려고 일부러 큰 옷을 입는 창업자들도 있어요. 놀랍게도 실제로 심사위원으로부터 "결혼했냐, 자녀가 있냐, 자녀는 누가 돌보냐, 남편은 뭐하냐, 시부모님은 창업하려는 걸 아느냐" 등의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김메이글=사실 냉정하게 보면 여성 창업자는 출산을 하면 인생에서 자녀를 1순위에 놓지만, 남성 창업자는 가족들의 생계와 관련된 사업을 1순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투자자는 자연스레 창업자에게 묻게 되는 겁니다. 당신 인생에서 1순위가 사업이 맞느냐구요. 이 질문 자체를 폄하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당신 인생에서 1순위는 사업인가요? 자녀인가요?"
김메이글 크립톤 이사
-여성 창업자들은 '여성 심사역이 늘면 여성 창업자들이 훨씬 수월하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에 동의하시나요?
최경희=일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본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성 창업자가 늘어나려면 우선 가정과 학교에서 교육이 변하는 게 먼저에요. 딸 혹은 여학생이 창업을 꿈꿀 때 부모와 학교가 충분히 독려할 수 있어야겠죠. 이와 더불어 의사결정권을 가진 여성 심사역이 늘어나야 하는 거겠지요. 단순히 여성 심사역이 늘어난다고 해서 여성 창업자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영경=저는 여성 심사역이 늘어난다면 그동안 여성 창업자에 대한 편견, 선입견으로 인해 객관적으로 투자가 이뤄지지 않은 부분들이 보완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반드시 여성 창업자일 필요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유망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인 펨테크(femtech·여성 건강이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기술)나 지방 소멸 문제를 풀어내는 인구 테크 관련 펀드를 운용해 보고 싶어요.
김메이글=스타트업이 성공하려면 글로벌 시장까지 잡을 수 있는 핵심 기술을 보유해야 합니다. 여성 공학도가 급진적으로 늘지 않으면, 이런 핵심 기술을 보유한 여성 창업자도 증가하지 않아요. 여성 심사역이 많아진다고 해서, 여성 창업자가 저절로 따라 늘어나는 건 아니겠죠. 아울러 정부가 어떤 분야에 중점 투자하는 지도 중요할 겁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10일 '글로벌 초격차 스타트업 육성 프로젝트' 사업을 발표했어요. 시스템 반도체·로봇·양자기술 등 10대 육성 분야가 대부분 공학을 토대로 글로벌 경쟁력을 노리는 분야입니다. 여성 창업자가 많이 배출되기 어려운 분야들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고, 또 이런 흐름으로 인해 여성 심사역 증가가 정체될 수도 있습니다.
-여성 창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가요.
김메이글=저는 지금까지 여성 창업자가 대표인 스타트업에 투자한 경험이 많습니다. 창업자가 여성이라서 투자한 건 아니었어요. 다만 여성 심사역이 여성 창업자에게 투자하면 서로 솔직해질 순 있더군요. 분명 남성 심사역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죠. 심사역은 창업자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아야 잠재력을 끌어올려줄 수 있어요. 저는 가끔 육아로 바쁜 여성 창업자의 자녀를 대신 봐주기도 합니다.(웃음)
최경희=저는 여성 창업자, 여성 투자자, 여대생 등 여성과 창업의 키워드가 있는 곳에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 참여하려고 합니다.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여성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실제 이런 직업을 갖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인데요. 이런 작은 일들이 모이면 변화의 기울기가 커질 것이라 믿습니다.
김영경=여성들이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힘들다는 것, 어렵게 창업하거나 입사한 뒤에도 버티는 게 만만치 않다는 것, 저도 경험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전 현재 상황을 비관적으로만 보지는 않아요. 대기업 여성 임원 비율도 2019년 3%대에서 지난해엔 6%까지 올라갔습니다. 인식의 변화, 제도 개선은 여러 부침 속에도 항상 우상향으로 발전한다고 믿고 싶습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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