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혜자…눈이 부시게 나이 들고 싶어서, 당신을 봅니다

김효실 2023. 1. 1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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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팀의 이 장면 NG, 이 장면 OK][이 장면 OK] 배우 김혜자와 <유퀴즈> 의 만남
“천국 못 가도 천국 문앞까지는 꼭 가고 싶어, 왜냐면…”
28살 어린 감독에게 혼나면서 배우고, 후배들엔 격려만
최근 토크 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한 배우 김혜자의 모습. ‘유 퀴즈 온더 튜브’ 갈무리

“어차피 텔레비전은 예술이 아니다.”

배우 김혜자가 자신이 출연할 작품을 신중하게 고르고 또 고르자, 누군가 그에게 한 말이다. 김혜자는 “너무나 서운해서” 이렇게 맞받았다.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온몸을 던져도 힘이 드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난 그렇게는 못해요.”

전세계 1억 가구 이상이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시청한 시대. 오늘날 ‘케이(K)-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사랑받기까지, 한국 콘텐츠 생산 현장을 지킨 수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연기 인생 61년차 배우 김혜자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1일 방송된 <유 퀴즈 온 더 블럭>(티브이엔, 이하 유퀴즈) 김혜자편은 배우 개인의 연기 열정과 삶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한국 대중문화사 곳곳에 자리한 사람들을 비추는 햇볕 같은 따스함으로 큰 여운을 남겼다.

<유퀴즈>의 한 장면. ‘tvN D ENT’ 갈무리

김혜자가 22년 동안 출연한 ‘국내 최장수 드라마’ <전원일기>(문화방송)의 자료화면은 흑백이었다. 한국에서 컬러 티브이 방송이 처음 시작된 해가 바로 <전원일기>가 등장한 1980년. 미국(1950년), 일본(1960년)보다 수십년 늦었다. 김혜자가 드라마 속 양촌리 ‘김 회장님 댁 사모님’ 이은심 역할로 출연할 당시 나이는 39살.

<유퀴즈> 진행자 유재석이 “아니 그럼 한창 젊은 나이에~(나이 많은 역할을 하셨다)”라며 놀라자, 김혜자는 당시 29살인데 60살 ‘일용엄마’ 역할을 맡은 배우 김수미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나이 드신 연기자가 별로 없었어요. 우리가, 말하자면 제일 선배예요.”

틀린 말이 아니다. 김혜자는 1962년 <한국방송>(KBS) 공채 탤런트 1기에 합격하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최초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방영된 지 6년 여쯤 지난 시점이었다. 김혜자의 실제 나이가 어느덧 여든 살을 넘겼다는 사실에서 많은 시청자가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김혜자는 김정수·김수현 작가의 작품에 출연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우리나라 드라마가 발전한 게 두 분이 겨루면서 (대본을) 썼을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tvN D ENT’ 갈무리

“저는 연기밖에 몰랐어요.” <유퀴즈> 방송 70여분 동안 김혜자가 수차례 강조한 말이다. 이 말은 자신을 소개할 때부터 시작돼,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토로할 때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제일 무서운 역이 ‘부엌살림 잘하는 주부’였다. 내가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라며, “실제 엄마로서나 아내 노릇은 빵점이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극중에서 콩나물을 다듬거나 이불 빨래를 하는 등 가사노동 연기를 실감 나게 하기 위해서는 집에서 미리 연습을 해야만 했다고 털어놨다.

‘내조의 왕’은 남편과 자녀들이었다. 딸,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오히려 연기력 향상을 이끄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외롭게 하면서 연기도 흐지부지하고 있으면 정말 면목 없어요. 그런 거 생각하면 전 진짜 연기 못하면 안 돼요. ‘너희 엄마는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니’ 그런 소리라도 듣게 해줘야 해요.”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남편에 대한 마음도 간절했다. “저는 이런 기도를 해요. 저는 죽으면 천국 못 갈지도 몰라요. 그래도 천국 문 앞까지는 데려다주세요. (천국에 있을) 남편에게 “미안해 자기 살았을 때 내가 너무 잘못했지”라는 말을 꼭 해야 하니까.”

‘tvN D ENT’ 갈무리

연기를 직업으로 대하기보다 “숨 쉬는 것처럼”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일부로, “연기는 곧 나”라고 여긴다는 김혜자. 그에게 있어 ‘연기에 몰두한다’는 의미는 자신만 챙긴다는 뜻이 아니다. 김혜자의 소명 혹은 ‘프로 의식’이 무엇보다도 ‘일로 만난 사람들’을 대하는 예의와 지혜에 있음을, <유퀴즈>는 또렷하게 보여줬다.

“존경해요, 너무 잘해요”  

김혜자는 연기 인생을 회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업적이 감독, 작가, 다른 배우 등 동료들과의 ‘공동 작업’ 속에서 이뤄졌음을 꾸준히 상기시켰다. 봉준호 감독, 노희경 작가 등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에게 “혼난 일”을 솔직히 털어놓고, 그 과정에서 “배웠다”고 느낀 점을 시청자와 나눴다.

김혜자에게 봉준호 감독은 “신경질 안 부리는”, “스태프들한테도 다 조용조용 말하는” 사람이자, 익숙한 역할을 벗어난 새로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다시 일으켜준 이다. 김혜자는 “제가 최불암 씨, 박근형 씨, 오지명 씨의 아내로, 내가 하는 역들이 ‘누군가의 부인’으로 고착되어서 이걸 어떻게 벗어나나 고민이 많을 때 봉준호 씨가 <마더>를 하자고 해서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팬”이라는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가 1995년 드라마 <여>(문화방송)에서 보여준 광기 어린 연기를 눈여겨본 일이 영화 <마더> 구상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유퀴즈>와의 통화에서 김혜자를 두고 “유머감각도 탁월하시고, 소녀 같은 면이 있다. 소녀 같지만, 흔히 말하는 공주 같은 그런 건 전혀 아니다”라며, “현장에서 헌신적이시고 특별 대우나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고 막내 스태프들 하는 것과 똑같이 해달라고, 편하게 생각하라고 먼저 얘기해 주셨다”고 말했다.

많은 시청자에게 ‘인생 드라마’로 꼽히는 <눈이 부시게>(제이티비씨)를 언급할 때는 드라마를 연출한 김석윤 피디에게 공을 돌렸다. “(김석윤 피디가 과거에 작품을 같이 하는 과정에서) 나를 유심히 보면서 내가 어떤 때는 애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지혜로운 할머니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눈이 부시게>의 그 사람(본인이 맡은 인물을 가리킴)하고 딱 맞은 거예요. (…) 내가 상(백상예술대상 대상)도 받았는데 사실 연출이 다 한 거예요.”

백상예술대상 유튜브 갈무리

김혜자는 최근 자신의 연기 인생을 담은 책 <생에 감사해>(수오서재)를 출간했다. 김정수 작가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40년 전, <전원일기>를 쓰게 된 신인 작가라고 연출가가 소개한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던 김혜자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젊은 사람이 쓰기 힘든 드라마인데, 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염려와 함께 사람에 대한 대접이 담겨 있었다. 이름 없는 작가라고 무시하는 대신, “꼭 잘 써 줘요.” 하는 격려와 응원이 담긴 따뜻한 눈빛. 그 응원에 힘입어 열심히 쓸 수 있었다.”

김혜자가 동료를 바라보는 눈빛. “사람에 대한 대접”과 “격려와 응원이 담긴 따뜻한 눈빛”을, <유퀴즈> 시청자들도 목격할 수 있었다. 김혜자는 <유퀴즈> 방송 내내 진행자 유재석, 조세호는 물론 스태프들을 향해 깊고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존경한다”, “잘한다”는 격려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눈빛들의 의미도 놓치지 않았다. 김혜자는 방송 중반부를 지날 때쯤 “지금 방송 같지 않고 재밌다”며, 자신 앞에 선 제작진을 향해 “저기 서서요, ‘너 잘하고 있어’ 그런 표정이에요. 그게 굉장히 중요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방송 말미에도 손을 들어 스태프들을 가리키며 “여기 여자 스태프들이 아주 기분 좋게 웃고 있어서요. 그게 마음이 놓여요”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tvN D ENT’ 갈무리

인터넷에서 유행한 말 가운데 “혜자스럽다”는 신조어가 있다. 김혜자가 모델로 참여한 도시락이 가격에 견줘 양과 질이 뛰어나다고 판단한 소비자들이 만든 말로, ‘넉넉하고 푸짐하다’는 뜻으로 확장됐다. 김혜자가 <유퀴즈> 마지막에 보여준 행동도 ‘혜자스러웠다’. 그는 퀴즈 정답을 맞히고 상금 100만원을 받자마자 <유퀴즈> 스태프들의 간식비로 쓰라고 돈을 돌려줬다.

김혜자의 이번 <유퀴즈> 출연은 책 <생에 감사해> 출간 소식을 전하는 취지를 겸해서 성사됐다. 책을 펴낸 수오서재 출판사의 황은희 편집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선생님께서는 늘 본인은 연기 생활을 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연기하면서 느꼈던 것, 배움을 얻었던 것, 배우로서 추구했던 것을 정리하고자 하셨다. <유퀴즈>에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연기자로서의 인생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혜자가 출연한 <유퀴즈> 176회는 ‘인생 드라마 특집’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수많은 시청자에게 다양한 ‘인생 드라마’를 선물한 김혜자는, 예능 프로까지 시청자들이 두고두고 볼 ‘레전드’편으로 만들었다. 여든 살을 넘긴 지금도 “앞으로 나에게 무슨 역이 주어질까, 그 생각만 해도 설레요”라고 말하는 배우. 덕분에 시청자도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설렌다. 오래오래 설레고 싶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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