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가 품은 ‘깡통’의 운명
금융상품화하면서 갖고 노는 사람 생기고 집값 상승도 부추겨
부동산 경기가 꺾일 때마다 가장 먼저 폭탄이 터지는 곳이 바로 전세시장이다. 전세는 월세보다 주거비용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세보증금을 떼일 위험이 상존한다. 월세 중심인 외국의 임대차시장과 달리 한국에는 전세·반전세 등 다양한 선택권이 있다. 특히 전세는 목돈을 마련해 ‘내 집 장만’으로 가는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과거부터 서민주거 안정을 위해 전세보증금을 지원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꾸준히 확대했다. 하지만 저금리 시기에 부동산투자 열기가 높아지면서 전세지원제도가 역설적으로 집값·전셋값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이 됐다.
무자본 갭투기를 가능하게 한 보증한도의 마법
전셋값 상승은 ‘깡통전세’의 위험도 키웠다. 깡통전세는 집값보다 전세보증금 등 부채가 더 많아 집주인이 집을 팔아도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다 돌려주지 못하는 주택을 말한다. 보통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보증금의 합이 집값의 80%를 넘으면 깡통주택으로 본다. 부동산 경기 침체기에 집값 하락으로 자연스럽게 깡통주택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애초 건축주·임대인·중개인 등이 짜고 세입자한테서 시세보다 높은 전세보증금을 받아 가로채는 전세사기 범죄도 횡행한다.
경기가 하락할 때마다 전세보증금을 떼이는 사고가 반복되자 정부는 2013년부터 세입자의 보증금을 보호하기 위해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을 도입했다. 임대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할 경우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세입자에게 먼저 보증금을 내주고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식이다. 세입자는 전세보증금의 0.11~0.15%를 연간 보험료로 내고 가입하면 보증금 떼일 걱정을 덜 수 있다. 정부는 2020년 등록임대주택 사업자는 반드시 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하도록 법을 개정해 세입자의 보증금 보호를 강화했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은 보증금을 지키는 안전장치로 인식되며 규모가 커졌다. 김학용 국민의힘 의원실이 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발급액은 2018년 19조367억원에서 2022년 54조4510억원으로 4년 새 3배 가까이 늘었다.
그런데 최근 ‘빌라왕’ 사건 등 전세사기의 구체적인 실태가 알려지면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제도의 허점도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느슨한 보증한도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2022년까지 보증한도를 주택 공시가격의 150%로 운영했다. 시세 대비 공시가격 비율(공시가 현실화율)이 2022년 기준 평균 71.5%임을 고려하면 ‘집값보다 높은 전셋값’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구조다. 예컨대 빌라의 적정 시세가 2억원이고 공시가격이 1억4천만원(공시가 현실화율 70% 적용)이면,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전세보증금 보증한도는 공시가격의 150%인 2억1천만원까지 나온다.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세입자의 전세보증금(2억1천만원)을 받아 집을 매입하고도 오히려 1천만원을 버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 보증한도의 ‘마법’이 무자본 갭투기를 가능하게 했다.
‘빌라왕’ 전세보증금 공시가격 150%
특히 매매거래가 별로 없어 시세정보가 불투명한 빌라는 세입자를 속이고 전세가를 부풀리기 쉽다. 적정 매매가가 2억원(공시가격 1억4천만원)인 경우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은 2억1천만원까지 한도를 내주므로 세입자에게 보험 가입을 권유하고 전세보증금을 2억1천만원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주택 1139채를 보유했던 ‘빌라왕’ 김아무개씨(2022년 10월 사망)의 피해자들은 대체로 해당 집 공시가격의 150% 한도에 맞춘 전세보증금을 낸 것으로 전해진다. 세입자는 전세가와 매매가가 같더라도 보증보험 가입으로 자신의 돈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임대인의 깡통전세 계약 요구에 응하게 된다.
규정의 빈틈을 악용한 전세사기가 늘면서 보증사고 규모도 커졌다.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해 주택도시보증공사가 대신 갚아준 돈(대위변제액)은 2020년 4415억원, 2021년 5040억원, 2022년 9241억원으로 매년 빠르게 늘었다. 하지만 주택도시보증공사가 집주인한테 회수한 금액은 2020년 2214억원, 2021년 2114억원, 2022년 2179억원으로 제자리걸음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허술한 보증 기준의 문제를 인식하고 2023년부터 신규 계약의 보증한도를 공시가격의 140%로 낮춰 운영한다. 하지만 140%를 적용해도 시세 2억원(공시가격 1억4천만원)인 집의 보증한도는 1억9600만원이어서 여전히 매매가에 육박한 전세보증금을 받는 깡통전세가 나올 수 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공시가격 적용 비율을 120% 수준이나 그 이하로 낮춰야 한다. 또 주택담보대출에 적용되는 담보인정비율(LTV)처럼 보증보험 가입 때도 주택가격의 일정 비율만큼 한도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 주택가격 하락기에도 임차인을 보호하는 등 깡통전세를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택도시보증공사 관계자는 “애초 제도 도입 당시에는 보증한도를 아파트는 매매가의 90%, 다세대주택은 80% 등으로 제한을 뒀지만 서민에게 실질적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지적이 나와 한도를 확대해왔다”며 “이번에 급격히 기준을 강화할 경우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어 연착륙하는 식으로 (보증한도를) 조정했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전세는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단순한 주택임대차제도를 넘어 개인 간 금융거래로 자리잡았다. 학계에서는 현대 전세제도의 기원을 조선시대 후기 가옥에 대한 ‘전당’(기한 내 돈을 갚지 못하면 물건을 처분해도 된다는 조건으로 돈을 빌리는 일)에서 찾는다. 1949년 미군정의 법률자문관이던 찰스 로빈기어는 한국의 전세제도가 서구의 모기지(Mortgage·부동산 담보 금융거래)와 유사한 제도라 보고 ‘한국민법전초안’에 전세권을 포함했다. 이후 1958년 제정된 민법에서 전세권이 제도화했고, 1984년 민법 개정으로 전세권자에게 우선변제를 받을 권리가 보장됐다(‘존폐기로의 전세제도’, 봉인식·장윤배·남원석, 2013).
가계금융 대표 채널, 자본축적 촉진해 경제성장에 기여
전세를 통해 집주인은 이자를 내지 않고 돈을 빌리고 세입자는 월세를 내지 않고 주택에 살 수 있어 양쪽 모두에 이익이 됐다. 또한 “금융기관들의 주택담보대출 취급이 많지 않던 시기에 전세제도는 가계금융 공급의 대표 채널로서 기능하며 자본축적을 촉진해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해왔다”.(‘한국의 전세금융과 가계부채 규모’, 김세직·고제헌, 2018)
정부는 전세의 순기능에 기댄 채 전세금융 규모를 키웠다. 1988년부터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을 관리하던 주택은행(현 국민은행)이 전세자금대출을 시행했다. 2004년 주택금융공사가 설립되면서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 관리를 넘겨받았고, 민간은행이 전세대출을 내주면 정부(주택금융공사)가 보증을 서는 현재의 방식으로 운영했다. 보증한도는 2004년 6천만원에서 다섯 차례 증액을 거쳐 2023년 현재 4억원에 이른다. 특히 윤석열 정부는 2022년 10월 전세 지원을 위해 보증한도를 2억원에서 4억원으로 대폭 확대했다. 이 외에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전세대출 보증한도는 4억원, 민간 회사인 에스지아이(SGI)보증보험의 보증한도는 5억원이다.
오피스텔 전세가율 2012년 67.5% → 2022년 83.6%
전세금융은 집값 상승을 부추기는 부작용도 일으켰다. 정부가 보증을 늘리는 만큼 대출도 증가하면서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2012년 23조2천억원에서 2021년 180조원까지 8배가량 불어났다. 이 과정에서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갭)만 조달해 집을 사는 갭투자가 성행했다. 이는 집값 거품을 만들어냈다. 정부 보증 덕분에 전세대출 이자가 신용대출 이자보다 낮으니 전세금을 낼 돈이 있어도 일단 전세대출을 받아놓고 여윳돈은 주식·부동산 등 자산시장에 투자하는 게 ‘상식’처럼 통용됐다. 집주인이 전세 호가를 올려도 세입자는 전세대출을 받아 충당할 수 있으니 전세가 상승에 제약도 없었다. 케이비(KB)부동산 통계를 보면 전국 오피스텔의 평균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가)은 2012년 67.5%에서 2022년 83.6%로 올랐다. 이미 깡통전세의 위험신호가 켜진 상황이다.
정준호 강원대 교수(부동산학)는 “전세대출이나 전세금반환보증은 정부가 주거복지 측면에서 시행하는 제도이지만 동시에 금융상품이다보니 투자 측면에서 상품(부동산) 가치를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며 “금융상품이면 안전성을 강화해야 하는데 서민보호 가치를 내세워 규정을 느슨하게 하다보니 제도를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어 “정부가 서민주거 복지를 위해서는 공공임대주택 확대를 핵심 정책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금융수단을 이용해오면서 전세가 변동에 따라 주거안정성이 취약해지는 부작용이 생기는 만큼 전세 지원 정책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에 맞게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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