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스파이 ‘유령’은 왜 여성이었을까[시네프리뷰]

2023. 1. 1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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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조국을 유린하는 일제에 맞서는 데서 존재의의를 찾는, 전형적인 저항민족주의 식민지 남성성 서사를 의도적으로 뒤집고 있다.
감독이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말한 ‘한 수’에 관객이 얼마나 공감할지는 의문이다.

제목 유령(Phantom)
제작연도 2023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133분
장르 액션
감독 이해영
출연 설경구, 이하늬, 박소담, 박해수, 서현우
개봉 2023년 1월 18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원작 마이지아 소설 ‘풍성’
제공/배급 CJ ENM
제작 더 램프㈜

더 램프㈜


3년 전쯤인가, 아이가 다니던 고등학교 연극동아리 공연을 보러갔다 생각이 많아졌다. 연극은 일제강점기 문학청년의 고뇌-예술이냐 독립운동이냐를 두고 고민하는-를 담은 내용이었다. 주요 등장인물이 인상 깊었다. 극 전개상 분명 주연배우는 20대 청년 남성 캐릭터인데 여학생이 주연을 맡고 있었다. 연극에 등장하는 전체 배우 중 남학생은 딱 한 명에 불과했다. 바로 전날 대학 과 행사에 참석한 경험이 겹쳐 떠올랐다. 과 학생회장이나 총학생회장을 여학생이 맡는 건 이제 흔한 일이 됐다. 행사 말미에 보통 과 학생회장단이 인사를 한다. 학생회장, 부학생회장 그리고 학생회에 흔히 있는 사회부·문화부·학술부… 그런 부서장을 다 여학생이 맡고 있었다. 딱히 과를 구성하는 성비가 ‘여초(女超)’로 바뀐 것도 아니었다. 당시 필자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에 학생회장단과 같은 학번의 남학생이 네 명쯤 있었다. 그들에게 물었다. 왜 남학생들은 과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냐고. 딱히 신통한 답이 돌아왔던 것 같진 않다. 군대에 가야 한다든가, 무슨 시험 준비를 한다, 뭐 그런 답이었던 것 같다. 커뮤니티 활동뿐 아니다. 출판사에서 기획을 담당하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독자 분석을 해보면 그나마 책을 사보는 층은 20대에서 30대 여성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커뮤니티, 공론장에서 젊은 남성이 거의 사라진 셈이다. 거대한 퇴각이다. 그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공론장에서 후퇴한 거대한 남성 집단이 원시시대 이래의 수렵본능을 해소하는 장(場)으로 온라인게임을 택했다는 분석이 잠정적으로 나온다. 엄밀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잠입한 스파이

영화 <유령>을 보면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영화 배경은 1933년 경성. 중국 상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테러사건을 일으킨 독립운동 비밀저항조직 흑색단은 조선총독부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스파이 ‘유령’을 침투시킨다. 총독부 내에 암약하는 유령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경호대장 카이토는 잔머리를 굴린다. 총독이 참석하는 행사 날짜와 관련한 가짜정보를 제공하고 그 정보전파와 관여된 총독부 내 사람들-대부분 조선인이다-을 다 바닷가 절벽 끝에 지어진 호텔(영화에서 자막을 따로 제공하진 않았으나 호텔 이름은 파도 호텔이다)에 납치해 ‘유령’을 가려내려 한다. 앞서 생각이 복잡해졌다는 건 실제 흑색단이 총독부에 스파이로 암약시킨 유령 조직원도 모두 여성이라는 점 때문이다. ‘과연 유령은 누구였을까’라는 의문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원작 중국 소설과 달리 영화는 처음부터 유령 조직원이 누구인지 까고 시작한다.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 감독은 전형적인 추리물 형식의 원작 소설을 프린트물로 읽었다-아직 국내에 원작 소설이 번역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딱히 연출할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데 추리물 형식을 뒤집으면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선택이 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걸까.

식민지 남성성 서사의 전복

설경구가 맡은 무라야마 쥰지는 이 영화의 사실상 남성 주인공이다. 경호대장 카이토는 끊임없이 그가 ‘유령’이 아닌가 의심한다. 카이토가 쥰지를 의심하는 건 그가 순혈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본의 고관대작이지만 어머니는 조선인이다. 쥰지의 아버지는 살해당했다. 카이토는 ‘더러운 피’를 가진 쥰지의 어머니가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다. 쥰지는 그런 자신의 신분상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유령 색출에 더 열심이다. 결과적으로 영웅서사의 빌런(악당)역이다. 설경구야 베테랑 배우이니 역에 충실했겠지만, 감독이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말하면서 이미 패를 다 까버린 그 ‘신의 한 수’에 관객이 얼마나 공감할지는 의문이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박차경에 대해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배우 이하늬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고 밝혔다. 영화는 ‘순결한 조국 강토를 유린하는 강도(일제)와 맞서는 데서’ 존재의의(Raison d’etre)를 찾는, 전형적인 저항민족주의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서사를 의도적으로 뒤집고 있다. 성공적이었을까. 글쎄.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자동기관단총을 들고 총독이 탄 승용차에 돌진하는 두 여성의 모습이 나온다. 비장미나 숭고미가 아니라 왜 뮤지컬 영화 <시카고>의 록시 하트와 벨마 켈리가 떠올랐을까.

왜 감독은 <드라큘라> 포스터를 접선 수단으로 정했을까

경향자료


유령 조직은 벨라 루고시 주연 영화 <드라큘라> 포스터의 출연 배우 이름 위에 점을 찍는 방식으로 지령을 내보낸다. 드라큘라의 포스터와 해독에 사용될 대본집을 이 영화의 오브제로 채택한 것은 의도적으로 보인다. 브램 스토커의 원작 소설 자체가 가지는 함의-피의 오염에 대한 공포: 영국으로 이주를 희망하는 동유럽 백작이 알고 보니 흡혈귀였더라는-는 쥰지의 캐릭터에서 보이듯 ‘식민지 남성성’에 천착하려는 이 영화의 숨겨진 ‘서브플롯’이다.

“박차경은 자신들과 근본적으로 신분이 다르다”는 유리코와 총독부 암호해독부서에서 일하는 천계장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박차경의 신분은 일제와 협력한 친일파 거두의 딸이다. ‘박씨 성을 가지고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일제강점기 사업가’라는 설명에 떠오르는 인물은 딱 한 사람, 화신백화점을 만든 박흥식(사진)이다. 해방 직후 만들어진 반민족행위자 처벌법 1호 구속자로 친일파의 상징적 인물쯤으로 거론된다. 그에게 독립운동에 헌신한 딸이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1994년 타계한 박흥식은 슬하에 2남1녀를 뒀다. 두 아들은 박흥식이 설립한 학교 일과 사업 일을 했다. 딸은 사립대 대학교수를 했다. 아무래도 박차경은 실제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기보다는 순수한 창작 캐릭터로 보인다.

타계 전 경제지와 한 인터뷰를 보면 박흥식은 형 박창식과 아버지 박제현이 자기가 어렸을 때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을 당하고 화병으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박흥식 자신도 형무소 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도산 안창호를 총독에게 부탁해 출옥시키고 보호한 경력이 있다.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과 김구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정상 참작할 사항이라기보다 시류의 변화에 재빨리 조응하는 기회주의자로서의 면모로 평가된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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