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본인”이라던 이봉창, 왜 일왕 처단을 시도했나[이기환의 Hi-story](67)
얼마 전 보물로 지정된 유물 가운데 ‘이봉창 의사 선서문’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적성(진심)으로써…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돼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이미 보물로 지정된 윤봉길 의사(1908~1932)의 선서문과 내용이 비슷한 문서인데요. 다른 문구가 있어요.
이봉창 의사(1901~1932)는 ‘적국의 수괴(일왕)’, 윤봉길 의사는 ‘적의 장교(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상하이 주둔군 일본 사령관)’ 등 도륙의 대상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봉창 의사 선서문의 보물 지정’ 보도자료를 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진이 첨부됐습니다.
교과서는 물론 각종 언론 자료 등에 소개된 이봉창 의사의 이미지, 뭐 다 아시죠. 말끔한 양복 차림에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죠. 보도자료에는 흐릿하고, 약간은 굳어 있는 이봉창 의사의 사진이 첨부됐습니다.
이유가 있겠죠. 지금까지 ‘이봉창 의사의 시그니처 이미지’로 알려진 ‘활짝 웃는 사진’이 ‘합성’으로 밝혀졌거든요(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의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휴머니스트·2015’).
웃는 이봉창 사진은 합성이었다 현전하는 이봉창 의사의 거사 직전 사진은 4장 정도 됩니다. 이중 1931년 12월 13일 제1호 한인애국단원으로서 선서식을 거행할 때 찍은 사진이 2점으로 추정되고요. 그 1장은 이봉창 의사가 간직하고 있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압수된 사진입니다.
이번 보도자료에 첨부된 사진입니다. 또 1장은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 거사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언론 등에 배포한 사진입니다. 또 다른 1장은 오버코트에 두 손을 넣고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이죠.
이 사진은 또 언제 찍었을까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단서가 있습니다.
“선서식 후(이봉창 의사 신문조서에는 17일 아침)… 내(백범) 얼굴에 처연한 기색이 있었는지, 이씨(이봉창 의사)가 말했다. ‘영원한 쾌락(일왕 처단)을 누리고자 이 길을 떠나니, 기쁜 안색으로 사진 찍자’고….”
‘합성’으로 판명된, 그 유명한 사진은 무엇일까요.
<도왜실기>라고, 1932년 백범이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정리해 중국어판으로 펴낸 책이 있는데요. 해방 후(1946) 출간된 <도왜실기> 한글판에 ‘수류탄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합성사진’이 실린 겁니다.
자세히 보면 정말 수류탄을 든 양손과 배경 속 태극기는 ‘그려넣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배경식 부소장). 거사를 더욱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진에 손을 좀 본 거겠지요. 또 이봉창 의사의 선서문에도 이상한 점이 보입니다. 이 의사가 미리 작성한 선서문의 ‘빈 날짜’란과 ‘빈 서명’란을 채웠습니다.
이봉창·윤봉길 선서문의 비밀 그렇다면 이봉창 의거의 의미가 퇴색되고, 따라서 선서문(사진 포함) 또한 보물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백범일지>에 뭐라 했습니까. 이봉창 의사가 표정이 굳어 있던 백범에게 “영원한 쾌락을 위해 떠나는데 웃으면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지 않습니까. ‘죽음마저 초월한 찬란한 그 미소’가 맞습니다.
1946년의 합성사진 또한 그 웃음 띤 얼굴을 살짝 얹은 거고요. 그분도 투사이기 전에 인간인데 거사를 위해 떠날 때 얼마나 심경이 복잡했겠습니까. 담담한, 아니 약간 굳은 표정의 사진이 그 심경을 대변하고 있죠. 따라서 웃는 사진도, 또 그 웃는 얼굴로 합성한 사진도 그 가치가 차고 넘치는 사료라 할 수 있습니다.
날짜와 이름만 써넣은 선서문은 또 어떨까요. 이봉창 의사뿐이 아닙니다. 윤봉길 의사 역시 미리 작성된 선서문에 이름만 써놓았습니다. 백범이 결성한 한인애국단의 제1호 단원이 바로 이봉창 의사였죠. 거사 직후 윤봉길 의사가 백범을 찾아와 “(이봉창 의사처럼) 나를 독립운동 자원으로 써달라”고 했죠. 이봉창의 의거가 없었다면 윤봉길의 의거 역시 일어났을까요. 두 선서문 역시 보물의 가치가 차고 넘칩니다.
신일본인 ‘기노시타 소죠’와 이봉창 이제 이봉창 의사의 각종 재판 관련 기록과 백범 김구의 저작물(<동경작안의 진상>·<도왜실기>·<백범일지>) 등을 토대로 이봉창 의사의 행적을 추적해봅니다. 사실 이봉창 의사처럼 극적인 반전의 인생을 산 분도 드물 겁니다.
이봉창 의사는 ‘서른 즈음’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의 ‘독’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답니다.
1901년 용산에서 태어난 이봉창은 집안 형편 때문에 보통(초등)학교(4년제)를 졸업한 뒤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후 5년간 일본인이 운영하던 가게와 용산역 등에서 일했는데요. 유창한 일본어를 그때 익혔습니다.
이후 일본 오사카(大阪)~도쿄(東京)를 전전하며 온갖 조선인 차별을 감내하며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이봉창은 차별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었습니다.
오히려 “난 조선인이 아니라 (한·일 합병으로 탄생한) 신일본인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봉창은 ‘기노시카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을 쓰며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신분은 계속 들통이 났고, 그럴수록 차별에 대한 좌절감이 더 심해져 갔죠.
취중 진담 급기야 이봉창은 1930년 10월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떠납니다.
“지금껏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살면서 고통을 겪었으니 이제 본명(이봉창)으로 살아갈 결심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봉창은 이듬해 1월 임시정부 사무실로 들어섰습니다. ‘반쯤은 일본말이고 동작조차 일본인과 흡사한 이봉창’을 누가 용납하겠습니까. 이봉창은 며칠 뒤 술과 고기를 사들고 찾아가 교민단 직원들과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술자리 대화는 2층에 있던 백범 김구에게까지 들렸습니다. 이때 이봉창의 취중 진담이 백범의 귀에 꽂혔습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한다면서 일본 천황(일왕)은 왜 죽이지 못하오?”
이 말을 들은 백범은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일왕 처단이라?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대담한 발상이 아닌가.’
마침 ‘요인을 암살·파괴하는 특무공작을 담당할 조직(한인애국단)’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백범은 이봉창이 묵고 있던 여관을 찾았습니다. 이봉창의 말과 표정에서 진심이 묻어나왔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간 육신의 쾌락을 맛봤으니 이제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독립사업에 헌신하렵니다.”
이봉창 의사는 이후 일본인(기노시타) 신분으로 위장하면서 은밀히 임시정부 사무실을 다녀갔습니다. 백범은 “이씨는 술에 취하면 호방하게 일본 노래를 유창하게 불러서 ‘일본 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하오리(羽織·기모노 위에 입는 웃옷)에 게다(下?)·일본 나막신)를 신고 임시정부 청사를 들어가다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습니다.
다른 임시정부 요원들은 “한인인지 일인인지 행색이 불분명한 자를 출입시키냐”고 못마땅해했지만, 백범은 “다 생각하는 바가 있다”며 무마시켰습니다.
수류탄을 던졌지만… 백범은 이봉창 의사의 의중을 탐색해보았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경성(서울)에서, 일본에서 당한 차별과 고생담을 털어놓으며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중간에 흐지부지하는 것이 싫으니 폭탄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결행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31년 11월 거사 자금이 마련되자 백범과 이봉창 의사는 일사천리로 움직입니다.
12월 13일 이봉창 의사의 ‘제1호 한인애국단 입단식과 선서식’을 열고 여러 장의 기념사진까지 찍었습니다.
12월 17일 드디어 수류탄을 지니고 상하이를 떠난 이봉창 의사는 22일 도쿄에 도착합니다.
이봉창 의사는 1월 8일 도쿄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열리는 육군시관병식(열병식)에 일왕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봉창 의사는 백범에게 “상품은 1월 8일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는 암호 전보를 보냅니다. 거사 날짜를 알린 겁니다.
거사일(1월 8일)까지 이봉창은 혼자 행동했습니다. 폭탄실험도, 예행연습도 없이 도쿄 현장에 왔죠. 함께할 동지도 없었습니다. 일본의 심장부에서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일왕을 처단한다는 어마어마한 거사를 순전히 홀로 감당한 겁니다. 솔직히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겠습니까. 이봉창 의사는 꿋꿋이 버텼습니다.
1932년 1월 8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참석한 시관병식이 열렸습니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일왕의 동선을 놓쳐 큰일날 뻔했지만 지름길로 겨우 따라잡았습니다. 인파를 헤치고 도쿄 경시청 앞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일왕 행렬이 사쿠라다몬(櫻田門)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 이봉창 의사가 수류탄을 투척했습니다. “꽝!” 폭탄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터졌습니다. 하지만 이 거사의 목표인 ‘일왕 폭살’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궁내부 대신이 타고 가던 마차가 부서지는 등 일왕 행렬이 아수라장이 됐지만….
거사 직후 이봉창 의사의 행동도 눈에 띕니다. 일본 경찰이 엉뚱한 사람을 체포하자 “그 사람이 아니라 나다. 나야”라고 자처했다는 겁니다. 일왕 폭살의 거사를 비겁하게 다른 이에게 전가할 수 없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법정에서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며 “일왕의 목숨을 빼앗고 싶었을 뿐”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일왕에게 위해를 가한 ‘대역죄인’(일본 형법 제73조)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9월 30일 사형 판결을 받은 지 10일 만인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집행됐습니다. ‘신일본인’을 자처했던 식민지 젊은이가 결국 ‘일본의 대역죄인’으로, 그러나 ‘한국의 독립투사’로 목숨을 바치게 된 겁니다.
불행(不幸)히 명중하지 못했다(未中) 이봉창 의거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1909), ‘윤봉길 의사의 시라카와 육군대장 등 폭사 의거’(1932) 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의 3대 의열투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한시준 독립기념관장).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그것도 일본인들에게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은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겁니다.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중국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중국 신문은 한결같이 일왕을 처단하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국민당 기관지인 민국일보는 “한인이 일왕을 저격했지만 맞추지 못했고(未中) 불행(不幸)히도… 실패로 끝났다”고 했습니다. 신보 역시 ‘미성(未成)’이라는 표현과 함께 이봉창 의사를 ‘한국지사’로 표현했습니다. 중앙일보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때… 한국지사 이봉창이 단신으로… 일왕을 저격했다”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의거였다”고 했습니다.
이런 중국 언론의 보도에 대해 중국 내 일본인들이 대거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불행 미중(不幸 未中·불행하게도 일왕을 맞추지 못했다)’의 표현을 쓴 민국일보는 결국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상하이에서는 일본인들의 폭동이 일본 해군육전대와 중국 19로군 사이의 무력충돌로 비화합니다. 이것이 제1차 상하이 사변입니다. 이봉창 의거가 중국-일본 간 전쟁으로 확대된 겁니다(한시준 독립기념관장).
백범은 그 와중에 한국독립당 명의로 이봉창 의거의 정당성, 즉 일왕을 처단해야 하는 9가지 이유를 밝히는 선언문을 언론에 배포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설파한 ‘이토 히로부미의 15대 죄상’을 방불케 하는 선언문입니다.
그중 “폭악한 일구(日寇·왜구)가 저지른 모든 책임이 바로 이 자(일왕)에게 있고, 도둑을 소탕하려면 먼저 그 수령(일왕)을 잡으라는 말이 있다”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이봉창 의사가 남긴 ‘거사의 변’을 인용해봅니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차별 대우하고 학대하고 있다. 조선인은 어떻게든 조선을 독립시켜 조선인의 국가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결코 이봉창 한 사람이 멋대로 벌인 난폭한 행동이 아니다. 조선민족을 대표해서… 결행한 것이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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