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K반도체 앞의 험로, 정치에서부터 풀어야 한다
1990년대까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았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경험을 보면 미국은 산업 경쟁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철저히 자국 이익에 우선해 움직여 왔음을 알 수 있다. 1980~90년대 반도체 패권 등 전자산업의 강세를 보인 일본에 막대한 무역 적자가 계속되자, 미국은 플라자합의와 1, 2차 반도체 협정, 슈퍼301조 등으로 일본을 압박했다. 그 결과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몰락이었다. 국가간 산업·기술 패권 전쟁의 시대에 영원한 우방은 없다. IRA가 어쩌면 플라자합의 시즌2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 졌다.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에 놓인 길이 매우 험난할 것임을 확인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오른 귀국길, 인천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간밤에 있었던 국내 소식을 살피고자 스마트폰을 켰다. 포털의 뉴스 페이지는 온통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검찰 출석에 관한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다. 사법 리스크에 대응하느라 미래 어젠다를 제시하지 못하는 거대 야당 대표, 개인의 사법 이슈에 떼 지어 몰려간 50여명의 공당 의원들. CES에서 치열한 기술 전쟁을 목격하고 돌아온 직후여서 더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국회의원은 국회라는 헌법기관의 구성원인 동시에 그 개인 하나하나가 헌법기관인데, 하는 일이라는 것이 고작 당대표의 바람막이 노릇이라니, 참담하다. 우리 국민들이 그러라고 뽑아 준 국회의원이 아닌데, 도대체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국가 혁신 순위는 각 나라의 R&D 투자, 조세 제도, 인적 자본, 다양성, 자율성 등 40개 항목을 놓고 평가한다. R&D 투자 항목에서는 이스라엘 다음 두 번째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높은 세율과 사이버 안보, 보수적인 분위기 등이 약점으로 꼽혔다.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은 혁신이라는 씨앗이 싹트고 자라기에는 받쳐주는 토양이 척박하다는 것이다. 결국, 정치의 탓이다.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R&D 투자를 하고 애써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개발해도, 국가가 북돋아 주기는커녕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 우리 기업들이 혁신상을 역대 최다로 받았다고 자축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런 대한민국 환경에서 이번 혁신상을 받은 11개 중소기업 중 과연 몇 개 기업이 10년 뒤에도 살아남아 있을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통렬한 반성과 다짐부터 있어야 한다. 우리 기업들이 이만큼 오는 동안, 우리 정치는 도대체 무엇하고 있었나.
우리 정치권은 아직도 산업이 처한 현실에는 눈과 귀를 막고 반도체 기업의 시설 투자 세제 혜택은 대기업 특혜라며 갈라치기 하려 한다. 첨단산업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일할 사람이 없어 공장이 멈춰 설 지경이니 수도권 대학의 관련 학과 정원을 확대하자는 주장에는 국토균형발전론을 들고 반대한다. 심지어는 우리 대한민국의 사활이 걸린 첨단 산업 정책을 정략적 거래의 대상으로 이용하려 하기 까지 한다. 국회의원들이 진영 전쟁에 함몰돼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를 땅에 파묻는 매국노(埋國奴)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도체는 대표적인 기정학(技政學, 첨단 기술 패권이 국제정치를 좌우한다는 의미)적 산업이다. 엄밀히 말하면, ‘가장 기정학적’인 산업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미국의 對중국 견제 전략에서 최우선 정밀 타격 대상이 반도체 산업인 것도, 미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칩스법(CHIPs Act)이 산업 정책이 아니라 국방 정책 및 예산에 관한 법안인 국방수권법(NDAA, 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에 포함돼 다뤄지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반도체는 기업 혼자서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고 잘하는 것 만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산업이 아니다. 이제는 외교와 정치의 영역이다.
미국은 안보의 관점에서 반도체 산업을 바라보면서 모든 전략을 수립해 우리 기업들을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압박해 오고 있는데, 기업이 단신으로 나가 미국 당국자와 대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 기업들의 기술 경쟁력이 아무리 세계 최고라 한들 정치와 외교의 차원에서 풀어줘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기술패권을 가지고 있는 우리 반도체 기업들이 기정학적 현안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함께 뛰어줘야 한다. 그것이 우리 기업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입지와 안보를 지킬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반도체 산업 지원은 결코 정쟁의 대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특정 산업, 기업 하나 도와주자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린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정치 논리에 빠져 다투기만 하다 K반도체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제21대 국회는 직무유기의 회기로 기록되고 말 것이다. 눈앞의 정쟁으로 시야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너른 시각을 가져줄 것을 여야의 동료 의원들께 간곡히 호소한다.
마지막으로 국민 여러분들이 반도체 특별법은 우리의 현재 뿐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는 절박감을 가지고 반도체 특별법이 처리되는 과정에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국회의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대통령도 당대표도 아니다. 결국에는 자신들에게 표를 주는 유권자,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준엄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의원들도 쉬이 반도체 특별법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반도체 발전의 발목을 잡는 자, 그가 매국노(埋國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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