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K반도체 앞의 험로, 정치에서부터 풀어야 한다

2023. 1. 1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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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자 국회의원 (광주 서구을)
양향자 국회의원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대면으로 개최된 CES 2023이 지난 8일 막을 내렸다. 오랜만에 전세계의 기대 속에 예년 규모를 회복해 열린 CES였던 만큼 기술 기업들간 진검승부의 장이라 할 만한 자리였다. 아직도 엔지니어의 본능이 남아있어 그런 것인지 첨단 기술의 발전을 목도하는 것은 언제나 경이롭고 가슴 뛰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토록 치열한 경쟁 지형에서 혹 우리 대한민국만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미국의 자국우선주의는 생각보다 노골적이고 잔인하다
게다가 이번 방미는 CES 참관뿐 아니라 미국의 IRA(인플레이션감축법) 발효 이후 미국측 관계자들을 만나 현지 분위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직접 느낀 미국 정부의 IRA 관철 의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니 믿고 싶었던 것보다 훨씬 더 확고했다. 2022년 8월에 발효된 IRA는 WTO와 FTA 등 무역 협정의 위반 소지가 큰 만큼, 11월 미국 중간선거 이후 의회 활동이 본격 재개되고 나면 수정 입법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현지에서 미국의 정치 및 산업 관계자들과 논의해 본 바로는 우리의 설득이 받아들여질 틈이 도무지 없어 보였다. 미국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고 잔인한 자국우선주의의 칼을 빼들었다는 것만 생생히 확인했을 뿐이다. IRA는 반도체 뿐 아니라 자동차, 바이오 등 전 산업에서 촘촘한 벽을 쌓고 미국 땅 안에서, 미국이 직접 기술을 개발하고 제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미국도 기술 패권을 수성하는 것에 매우 절박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1990년대까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았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경험을 보면 미국은 산업 경쟁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철저히 자국 이익에 우선해 움직여 왔음을 알 수 있다. 1980~90년대 반도체 패권 등 전자산업의 강세를 보인 일본에 막대한 무역 적자가 계속되자, 미국은 플라자합의와 1, 2차 반도체 협정, 슈퍼301조 등으로 일본을 압박했다. 그 결과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몰락이었다. 국가간 산업·기술 패권 전쟁의 시대에 영원한 우방은 없다. IRA가 어쩌면 플라자합의 시즌2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 졌다.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에 놓인 길이 매우 험난할 것임을 확인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오른 귀국길, 인천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간밤에 있었던 국내 소식을 살피고자 스마트폰을 켰다. 포털의 뉴스 페이지는 온통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검찰 출석에 관한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다. 사법 리스크에 대응하느라 미래 어젠다를 제시하지 못하는 거대 야당 대표, 개인의 사법 이슈에 떼 지어 몰려간 50여명의 공당 의원들. CES에서 치열한 기술 전쟁을 목격하고 돌아온 직후여서 더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국회의원은 국회라는 헌법기관의 구성원인 동시에 그 개인 하나하나가 헌법기관인데, 하는 일이라는 것이 고작 당대표의 바람막이 노릇이라니, 참담하다. 우리 국민들이 그러라고 뽑아 준 국회의원이 아닌데, 도대체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7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매경미디어그룹 후원으로 열린 엑스삼성 CES 2023 네트워킹 행사에서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데이비드 류 마이크로소프트 부사장, 로빈 비엔페이 애틀란타테크파크 창업자, 이민구 엑스삼성 의장, 양향자 의원, 홍정민 의원, 김동수 LG테크놀로지벤처스 대표, 장용승 매일경제 디지털테크부장, 이원강 XL8 한국법인장. <매경DB>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우리 앞의 과제가 너무 많다
이번 CES 2023에서는 국내 기업 111개사가 혁신상을 수상하며 역대 최고 실적을 이뤄냈다고 자축하는 분위기다. 중소기업도 11개 기업이 혁신상을 받아 최다 수상 기록이다. 기업 각각의 기술을 두고 겨루는 자리에서 이러한 성과를 낸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다. 우리 기업들이 그만큼 글로벌 최고 수준인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지만 각 나라의 환경이 기업 활동과 혁신에 얼마나 우호적인지를 평가한 국가간 경쟁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CES를 주최하는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가 발표한 국가 혁신 순위(International Innovation Scorecard) 평가는 70개국 중 겨우 26위에 그친 것이다. 평가 대상 국가 중 중위권의 성적표다. 세계시장을 리드하는 기술기업을 여럿 보유한 우리나라가 당연히 1~2위는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필자에게 26위라는 소식이 처음에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17개 평가 항목을 하나하나 확인한 후에는 곧 그 결과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대한민국의 현실을 가감 없이 꿰뚫은 매우 정확한 평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국가 혁신 순위는 각 나라의 R&D 투자, 조세 제도, 인적 자본, 다양성, 자율성 등 40개 항목을 놓고 평가한다. R&D 투자 항목에서는 이스라엘 다음 두 번째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높은 세율과 사이버 안보, 보수적인 분위기 등이 약점으로 꼽혔다. 아직도 우리 대한민국은 혁신이라는 씨앗이 싹트고 자라기에는 받쳐주는 토양이 척박하다는 것이다. 결국, 정치의 탓이다.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R&D 투자를 하고 애써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개발해도, 국가가 북돋아 주기는커녕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 우리 기업들이 혁신상을 역대 최다로 받았다고 자축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런 대한민국 환경에서 이번 혁신상을 받은 11개 중소기업 중 과연 몇 개 기업이 10년 뒤에도 살아남아 있을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통렬한 반성과 다짐부터 있어야 한다. 우리 기업들이 이만큼 오는 동안, 우리 정치는 도대체 무엇하고 있었나.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DX부문장)이 4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베이 호텔에서 열린 ‘CES2023’ 삼성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제공 = 삼성전자
기업은 애국전쟁, 정치인들은 매국(埋國) 전쟁
우리 산업 현장과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국가 혁신 순위의 점수표를 현실 세계로 고스란히 옮겨둔 듯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작년 12월 말 반도체 특별법 개정안 통과 과정은 어떠했나. 각국이 반도체 강화를 위해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최소한 경쟁국과 비슷한 수준까지는 지원을 해 주자고 발의한 법을 4개월여 동안 방치해 뒀다가 하루아침에 제대로 된 논의 한번 없이 턱없이 부족한 수준으로 통과시켜 버렸다. 미국, 일본, 대만 등 경쟁국들이 자국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기 위해 어떻게까지 하고 있는지 단 한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다면,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이 처한 상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정치권은 아직도 산업이 처한 현실에는 눈과 귀를 막고 반도체 기업의 시설 투자 세제 혜택은 대기업 특혜라며 갈라치기 하려 한다. 첨단산업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일할 사람이 없어 공장이 멈춰 설 지경이니 수도권 대학의 관련 학과 정원을 확대하자는 주장에는 국토균형발전론을 들고 반대한다. 심지어는 우리 대한민국의 사활이 걸린 첨단 산업 정책을 정략적 거래의 대상으로 이용하려 하기 까지 한다. 국회의원들이 진영 전쟁에 함몰돼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를 땅에 파묻는 매국노(埋國奴)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3일 백악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만나 어깨동무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와 외교 없이 반도체 패권이 있을 수 없다
국내에서의 사정이 이러한데, 우리 기업이 해외에서 뛰면서 정치권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당대표의 바람막이는 할지언정, 기업을 위해서는 함께 뛰어주지 않는다.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은, 기댈 언덕 없는 고아나 다름없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기정학(技政學, 첨단 기술 패권이 국제정치를 좌우한다는 의미)적 산업이다. 엄밀히 말하면, ‘가장 기정학적’인 산업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미국의 對중국 견제 전략에서 최우선 정밀 타격 대상이 반도체 산업인 것도, 미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칩스법(CHIPs Act)이 산업 정책이 아니라 국방 정책 및 예산에 관한 법안인 국방수권법(NDAA, 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에 포함돼 다뤄지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반도체는 기업 혼자서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고 잘하는 것 만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산업이 아니다. 이제는 외교와 정치의 영역이다.

미국은 안보의 관점에서 반도체 산업을 바라보면서 모든 전략을 수립해 우리 기업들을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압박해 오고 있는데, 기업이 단신으로 나가 미국 당국자와 대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 기업들의 기술 경쟁력이 아무리 세계 최고라 한들 정치와 외교의 차원에서 풀어줘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기술패권을 가지고 있는 우리 반도체 기업들이 기정학적 현안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함께 뛰어줘야 한다. 그것이 우리 기업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입지와 안보를 지킬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공장인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이 라인에서 EUV 공정을 적용한 첨단 모바일 D램이 생산된다. <사진제공 =삼성전자>
이제 다시 국회의 시간, 정쟁을 넘어 미래를 보자
비록 반도체 특별법 개정안이 애초의 기대에 못 미친 채 통과되기는 했지만, 정부가 즉시 세액 공제 폭을 상향 조정해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당장 국회 문턱을 넘을 일이 걱정이다. 재벌 특혜라는 논리를 내세운 야당의 반대가 또다시 예상된다. 여야의 대치 상황을 보면 과연 협치라는 것이 가능할지나 모르겠다.

반도체 산업 지원은 결코 정쟁의 대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특정 산업, 기업 하나 도와주자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린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정치 논리에 빠져 다투기만 하다 K반도체의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제21대 국회는 직무유기의 회기로 기록되고 말 것이다. 눈앞의 정쟁으로 시야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너른 시각을 가져줄 것을 여야의 동료 의원들께 간곡히 호소한다.

마지막으로 국민 여러분들이 반도체 특별법은 우리의 현재 뿐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는 절박감을 가지고 반도체 특별법이 처리되는 과정에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국회의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대통령도 당대표도 아니다. 결국에는 자신들에게 표를 주는 유권자,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준엄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의원들도 쉬이 반도체 특별법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반도체 발전의 발목을 잡는 자, 그가 매국노(埋國奴)다.

국회의사당 전경 <사진 제공=대한민국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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