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북한산] 빨간 바지와 축지법 할머니
'드라마 북한산'은 소설적 상상력으로 풀어가는 코스 가이드 기사다. 에세이나 현장 르포가 아닌, 가상의 인물이 산행을 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편집자-
남자는 벼랑 끝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문득 그가 3초 뒤에 뛰어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윗길이 무서워서 누군가 나타나길 기다린 건 사실이었고, 나도 살고 그도 살리고 싶었다.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하고 불렀을 때, 고개를 돌린 남자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다 큰 어른이 그렇게 울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소화되지 못한 슬픔이 식도 속에 꾸역꾸역 쌓인 채 참고 참았다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게 느껴졌다.
"도와 달라"고 한건 나였으나, 도움을 주고 싶은 것도 나였다. 어떻게 해야 이 남자가 마음을 고쳐먹을까 고민하는데, 순순히 나를 끌어주었다. 위태로운 곳을 벗어난 뒤에 남자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고개를 반쯤 돌린 모습이 마치 '갈 테면 가도 되지만, 잡아주지 않으면 황천길 갈 거예요'하고 반협박하는 꼴이었다. 내 앞가림도 못 하는 나였지만, 남자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제가 처음이라 그런데, 정상까지 가는 길이면 같이 가면 안 될까요?"라고 묻고서도, 거절하면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런데 너무 쉽게 "네"라고 답하며 눈물을 닦는 그 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외로웠구나, 누군가 도닥여 주었다면 이렇게 죽을 사람은 아닌데, 아무도 없었구나.
숨은벽 바윗길을 내려오면서, 안심시켜 주고 다리를 받쳐 주는 배려가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내려왔을까 싶었고, 상황은 역전되었다. 지금은 그가 나를 살리고 있었다. 계단이 있는 안전한 등산로에 닿고서야 나도 울어서, 꼴이 말이 아님을 알았다. 순간 부끄러움도 잊고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죽으려 했던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남자는 해맑게 웃었다. 못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북한산 정상 백운대에서 그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햇살이 그토록 황홀하게 지는 걸 같이 볼 때만 해도, 남자가 삶의 태도를 바꾼다면 가끔 만나 산행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눈빛이 변해 있었다. 벼랑 끝에서 울먹이던 아이는 어디가고, 듬직한 사내가 '지금 여기서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오늘 그는 죽지 않을 것 같았다. 연락처도 이름도 모르지만, 북한산 어디선가 다시 만날 것 같았다. 아니, 만나지 못해도 상관없다. 나 역시 숨고 싶어서, 숨은벽에 가놓고선, 거지꼴로 그것도 밤에 산을 내려오는 꼴이라니. 여전히 귀가 아팠다.
폭언권법을 제압하려면 무심권법뿐
은행 창구에서 일할 때까지만 해도 나의 귀는 문제가 없었다. 점포가 없어져 고객만족센터로 가면서부터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의 힘은 강력했다. 친절한 고객도 많았지만, 말을 칼처럼 휘두르는 압도적 폭언의 공격력.
언제나 "죄송합니다. 고객님, 그렇게는 어렵습니다"라고 원칙대로 답할 때, 속이 타 들어가는 듯했다. 선배들은 "한쪽 귀로 흘리는 게 내공의 비결"이라 했지만 가시 돋친 말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말랑말랑한 귀를 무심하게 바꿔놓고 싶었다.
이비인후과에서는 귀를 너무 자주 만지는 것 같다며, 귀 안이 부어 있다고 했다. 손가락과 면봉으로 워낙 자주 귀를 후빈 탓에 역효과가 난 것. 사람이 피곤하고, 소리가 피곤해진 것이라 스스로 진단했다.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치료는 허허실실 무심권법을 배우는 것뿐.
항상 유치한 것이 끌렸다. 이상하게 심각한 영화는 5분 이상 내용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주성치 감독의 영화 <쿵푸허슬>처럼 생각 없이 박장대소할 수 있는 영화가 좋았다. 가장 하층민으로 보이는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보면 무림고수라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다. 무림비기를 익혀 광분하는 고객들의 폭언권법에 맞서고 싶었다.
가본 적 없는 곳에 가기로 했다. 중국 소림사로 가서 머리를 깎거나, 하다못해 UFC 주짓수라도 배우고 싶었으나 카드 값에 묶인 현실은 북한산이었다. 숨은벽 산행 후 일주일은 다리에 알이 박여 고생했지만, 북한산은 집을 나와 1시간 만에 닿을 수 있는 가장 비현실적인 곳이었다.
잠룡동潛龍洞계곡으로 갔다. 이름이 좋았다. 용이 승천했다는 계곡은 많지만 '용이 잠기는 계곡'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곳에 가면 은거한 절세 고수를 만나 비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그때 숨은벽 남자의 눈빛을 몇 시간 만에 바꿔 놓았던 북한산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잠룡동계곡은 잊혀져 있었다. 오래된 지명이지만, 워낙 깊은데 있고, 화려한 경치가 없는 골짜기라, 회원 수 1만 명이 넘는 등산 카페에 질문을 올려도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잠룡, 북한산의 정규 탐방로 중에서 가장 긴 계곡의 최상류 계곡. 여간한 산행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비밀의 계곡이 마음에 들었다.
빨간 바지의 조조
조금 늦게 집을 나섰다. 무수한 등산인파의 소음을 듣고 싶지 않았다. 불광역에서 버스를 타고 진관동으로 들어서자, 거인 같은 바위능선이 다가와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숨은벽에서 느꼈던 바위 돌기의 촉감, 벌벌 떨었던 엄청난 고도감, 울다가 웃던 그 남자, 황홀했던 노을까지 떠올랐다. 산이 있어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기 일쑤였는데, '저 봉우리에는 장판교의 장비 같은 고수가 숨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부터 장비가 좋았다. 유비나 관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놀리기 일쑤였으나, 난폭하고 거친 수염의 장비가 좋았다. 장비는 강력하고, 배신하지 않는다.
등산복 입은 사람은 죄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내리는 듯했다. 혼자 온 이는 나뿐이었지만, 등산화, 스틱, 장갑, 패딩, 비니, 귀마개, 보온병, 간식, 랜턴까지 준비했다. 올 때마다 장비가 늘어나 '이쯤 되면 등산 고수로의 입문인가'하고 혼자 으쓱거리는데, 빨간 바지에 거울처럼 반사되는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가 나를 보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조 같았다.
무안하여 시선을 돌리고 정색하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려는데,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아뿔사 조조가 눈치 챘다. 신묘한 계획으로 무림비기를 가로채려 나타난 것이다. 최대한 거리를 두며 넘어가는 숨을 고를 세도 없이 내공을 끌어올려 빠르게 걸었다. 보온병이 달그락 거리는 게 신경 쓰였지만, 이 또한 빨간 바지의 계략인 걸 알고 있었다.
앙상한 가지가 온통 산을 메우고 있었다. 건드리면 부서질 듯한 뼈다귀 같았다. 바람은 송곳 같았다. 한 번 불 때마다 노출된 피부를 푹 찌르고 달아나는 조조의 부하들. 하후돈만 없으면 승산 없는 승부는 아니었다. 전쟁에서 화살에 맞은 자신의 눈을 뽑아 씹어 먹었다는 그의 기행은 악몽의 단골 출연자였다. 오향장육 먹듯 눈알을 맛있게 씹는 하후돈이 꿈에 나오는 날은 돼지고기를 피하는 징크스가 있다.
기대와는 달랐다. 무림고수가 숨어 있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줌마들의 웃음소리가 화살처럼 고막에 와서 꽂혔다. 조조의 계략인가 싶었으나 보이지 않았다. 대서문에 닿아, 지나는 등산객 무리 몇몇을 보내고서야 정적이 다가왔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두 번째 산행인데 왜 이리 산이 편한 걸까. 정말 내 적성은 '자연인'인 걸까? 내가 장비라면 어디에 숨어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있는데 빨간 바지 아저씨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출발하려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도망가야 하지'싶어 제자리에 서있었다. 빨간 바지는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혼자 왔어요?"하는 물음, 순간 당황해 나도 모르게 "네 고객님~"하고 툭 튀어 나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재킷을 여미며 스틱을 두 손에 꼭 쥐었다. 조조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직업 정신이 투철하네요. 이 코스 모르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하고 능글맞게 말을 이었다. 그 수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초보 아니에요. 괜찮아요"하고 강수로 받아치고, 무시하듯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초보자 혼자는 위험할 텐데… 안전산행해요"하는 서운함 깃든 목소리가 들렸다. 조조의 계략에서 벗어나, 동탁같이 배 나온 사내 주위로 몰려오는 등산객 무리를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내가 등산 초보인 걸 어떻게 알았을까? 역시 조조는 조조였다. 아직 마수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계곡은 반쯤 얼어 있었다. 층층이 얼어붙은 계곡 한쪽은 크리스털 궁전 같았다. 오를수록 사람은 줄어들고 있었다.
백운대 가는 갈림길을 지나자 확연히 고요해지고 가팔라졌다. 꼴딱꼴딱 숨이 가쁜 와중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수인 내가 고수를 이기는 건 정신력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지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증기기관차마냥 숨이 거칠게 흘러나왔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온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았다. 진짜 무림고수가 되어가는 건가 싶었다.
북한산은 역시 고수의 영역이었다. 산길은 고통스러우면서 신비로웠다. 묵은 스트레스가 조금씩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이 산은 어떻게든 묵은 감정을 토하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신선처럼 서 있는 첨봉을 보노라면 경외감이 들었으나, 눈앞의 무자비한 비탈에 욕이 나왔다.
진짜 고수는 축지법 할머니
깊은 골짜기에, 이렇게 화려한 정자가 있는 게 신기했다. 산영루山暎樓였다. 제갈량이 잘난 척하며 차를 마실 법한 분위기였다. 제갈량은 없고 소위 몸빼바지를 입은 할머니가 나를 추월했다. 등산화만 신었지 시골 장터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할머니였다. 아마 사찰이나 암자를 찾아온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인적이 줄어 조금 불안하던 차에 할머니를 따라 산을 올랐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얼어붙은 빙판이 비탈길에 괴물처럼 버티고 있었다. 아이젠이 없어 그냥 갔다간 크게 넘어져 다칠 것 같았다. 앞서 간 할머니를 찾는데 산길 위의 나무를 난간처럼 쓱쓱 잡고선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역시 <쿵푸허슬>의 주인장 아줌마마냥 평범하게 위장한 고수가 분명했다. 할머니의 발자국을 따라 낙엽을 밟으며 비탈로 우회했다. 옷은 지저분해졌지만 산길만이 정답은 아님을, 간단하지만 생각지 못했던 묘수를 깨달은 기분이었다.
할머니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볕이 잘 드는 중흥사에서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마시며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안내판에는 추사 김정희가 여기서 남긴 시 구절이 적혀 있었다.
'번뇌는 과연 다 없어졌나, 공산의 비바람 소리만 들리는구나.'
잘 모르지만 명필 김정희조차 산행을 통해 번뇌를 지우고자 했던 마음이 와락 다가왔다. 고등학교 수업 시간 이후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김정희가 가깝게 다가왔다.
이제부터가 잠룡동이었다. 아무리 전설이라 해도 '용이 잠기는 계곡'이라 하기엔 초라했다. 흔한 시골 야산 골짜기 같았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스토리는 반전이 있기 마련이다.
시골 야산에 고수가 없다는 건 편견이지, 생각하며 오르는데, 언제부턴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불안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소리가 없었다. 등산객 소리며, 뭔가 소음이 있었는데 갑자기 고요해졌다. 떨어지는 낙엽이 땅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산행을 멈추고 터만 남은 보광사지에 앉았다. 은둔 고수가 있다면 여기쯤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트로트 음악을 틀고 산행하는 할아버지나, 라디오를 켜고 걷는 아저씨도 지금은 없었다. 내가 찾을 수 없다면 기다리는 게 정답일 터.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용처럼 물뱀처럼 나를 휘감는 바람. 그냥 바람이 아닌 것이다. 잠룡이 내게 주는 어떤 신호인 것. 문득 장비가 고요를 깨고 "하하하하"하고 웃으며 나타날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살면 다 살아진다"
'어서오게 장비'라는 마음이었으나 축지법 할머니였다. "어디서 왔소?"하는 물음에 머뭇거렸다. "신당동요"라고 답하자, 할머니는 다시 "여기서 뭐하고 있소?"하고 물었다.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잠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신 "여긴 이름이 왜 잠룡동인가요?"하고 물었다.
할머니가 대답했다. "잠잠하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그런 게지"하는데, 잠잠한 것과 잠룡은 연관성이 없어보였으나, 지어낸 말 같지도 않았다. 근처 암자에서 보살 노릇을 하고 있다는 할머니는 어릴 적 산에 살던 화전민이었고, 여기가 집터라고 했다. "안내판에는 고수들이 수련하던 절터라고 되어 있는데"라고 하자 "그건 100년 더 전 얘기고"라며 말을 잘랐다. 인사도 없이 할머니는 사라졌다.
여기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믿고 싶지 않았다. 간혹 지나가는 새 소리가 사이렌처럼 크게 들렸다. 뭔가 깊이 있는 명상을 하고 싶었으나, 1분도 눈을 감고 있기 어려웠다. 허허실실 무림권법을 얻는 것은 실패인가, 조용히 초코바를 씹으며 앞일을 도모하는데,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조조인가 싶어 스틱을 꽉 쥐는데, 할머니가 "절밥 남았어"라며 따라오라 했다. 판잣집에 가까운 작은 암자에서, 할머니는 된장국과 흰 쌀밥을 주었다. 밥을 먹는 내게 할머니는 "혼자 산에 온 거 보면 고민이 있어서 온 건데"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긴 한데요"라고 하자, "남자는 다시 만나면 되는 것이여"라고 말을 잘랐다.
누룽지까지 내어주시고선 "살면 다 살아진다"며 할머니는 등을 두드려주었다. 스마트폰 지도앱이 있다고 해도, 할머니는 "잠룡동 왔으면 잠룡봉 문바위 보고 가야지"라며 산길을 구구절절 일러주었다. 흰 밥을 먹었을 뿐인데 아랫배에서 따스한 기운이 번지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밥에 무림비기가 담겨 있었던가. 평범한 고수는 할머니였나 싶었다.
대남문에 올라서자, 등산객들로 시끄러웠다. 소란스런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기분이었다. 대남문 위에서 경치를 보는데, 빨간 바지 아저씨가 어떤 아줌마와 "하하 호호"하며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한껏 신나 보여,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조조의 계략에 빠진 초선을 구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으나, 아주머니는 초선이 아니었고 조조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북한산성을 따라 능선을 올랐다. 다들 오르는 문수봉 대신 반대 방향으로 갔다. 꼭대기엔 여포가 괴력으로 올린 듯한 바위가 문처럼 놓여 있는, 문바위가 있었다. 잠룡봉 정상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경치가 보고 싶었다. 문바위 구멍 틈 사이로 다가갔다. 너무 높아 무서웠으나, 몸이 멈추지 않았다. 문바위 밖으로 몸을 내미는 것도 모자라, 넘어가 바위 위에 섰다.
개미처럼 작은 빌딩숲이 한강 너머까지 드러났다. 해는 느리게 기울었고, 바위능선은 도열한 10만 대군처럼 뻗어 있었다. 새 한 마리가 날개 한 번 퍼덕이지 않고 허공을 오르내렸다. 허허실실 무림비기는 장비가 아니라, 새가 알고 있었다. 바람 속에서도 날개 한 번 퍼덕이지 않는 무심한 비결. 날개 쫙 펴고 시간이란 바람을 흘려보내는 것.
서울이 내 발 아래였다. 참 평화로웠다. 이상하게도 귀가 아프지 않았다.
잠룡동계곡 코스 가이드
최고 고도
잠룡봉 정상 666m
난이도
★★★ (갈림길에서 길찾기 주의해야)
총 거리 & 소요시간
8km & 4시간 소요
들머리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날머리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평창공원지킴터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1.7km 40min 새마을교 화장실 1.7km 60min 중흥사 1.0km 30min 보광사지 1.0km 40min 대남문 0.1km 5min 잠룡동 문바위 0.3km 5min 대성문 2.2km 60min 평창공원지킴터
산행길잡이
잠룡동계곡은 북한산국립공원의 정규 탐방로 중에서 가장 긴 계곡의 최상류 골짜기다. 옛 문헌에 나올 정도로 잠룡동계곡과 잠룡봉은 오래된 지명이지만, 지금은 잊혀진 이름에 가깝다. 중흥사에서 대남문으로 이어진 골짜기가 잠룡동인데, 화려한 암반계류나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절터나 집터로 삼기 좋은 너른 공간이 있는 상류라 찾는 등산객이 드물다.
서울 시내에서 접근하려면 구기동에서 대남문으로 올라 곧장 내려서면 잠룡동이다. 잠룡봉은 대남문에서 백운대 방향으로 100m를 오르면 된다. 봉우리 정상부에 대문처럼 생긴 바위인 문바위가 있어 쉽게 식별할 수 있다. 별도의 표지석은 없다. 잠룡봉은 보현봉과 사자바위로 이어지는 사자능선이 분기하는 봉우리라 나름 의미가 있다.
잠룡봉 정상부는 넓진 않지만 경치는 탁월해, 건너편 문수봉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보통 대남문에서 백운대 방면으로 갈 경우 잠룡봉을 넘지 않고 우회하는 경우가 많아, 북한산을 제법 다닌 사람도 모르는 이들이 많다. 계곡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하류에서 올라가야 한다. 하산길로 택하면 걸음이나 마음이 빨라져 경치가 쉽게 들어오지 않고, 내려서면서 보는 계곡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5km에 이르는 긴 계곡을 거슬러 오를 땐 시간과 마음을 여유롭게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좋다.
북한산성 입구는 많은 등산객이 찾지만 원효봉 방면이나, 의상봉 능선, 백운대 방면, 용암문 방면으로 대부분 빠진다. 계곡을 오를수록 등산객은 줄어들어 잠룡동이 가까워질수록 호젓한 산행을 할 수 있다.
대남문에서 문수봉을 오를 수도 있으나 잠룡동에 왔다면, 잠룡봉을 보는 것이 순리다. 잠룡봉에서 대성문으로 가서 평창동으로 하산하는 것이 최단 경로다. 일선사 갈림길에서 청수장 방면 정릉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특별히 위험한 구간은 없어 초보자도 가능하며, 지구력만 있으면 누구나 오를 수 있다. 갈림길이 많고, 갈림길마다 국립공원 이정표가 있다. 전체적인 코스를 이해하고, 이정표만 잘 살피면 길찾기는 쉽다.
교통
지하철 3, 6호선 불광역이나 연신내역에서 704번 혹은 34번 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입구' 정류소에서 하차한다. 불광역에서 30분 정도 걸린다. 하산 지점인 평창지킴터에서는 골목을 따라 1km 걸어야 '롯데아파트' 버스정류소에 닿는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