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김상미 “자연 본성대로 사는데도 피해 주지 않는 단독자처럼”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3. 1. 18.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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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디붉은 너도 내 신세 같구나. 7, 8년 전쯤, 부산에 갔다. 해운대가 보이는 동백섬에는 동백꽃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붉은 꽃잎, 길고 가지런한 꽃술, 단정한 꽃받침... 평소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예쁜 줄 몰랐다. 떨어진 동백꽃에서 애달픈 자신의 모습이 살짝 엿보이기도 했다. 슬펐다. 꽃이 질 때는 왜 이리 슬플까.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는 시상이 먼저 떠올랐다.

다시 어느 봄날, 우연히 꽃이 피는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됐다. 비록 서서히 피었지만, 꽃이 피는 게 느껴졌다. 황홀했다. 인간에게서 볼 수 없는 어떤 완벽함. 신의 경지였다. 개화의 황홀과 낙화의 비애가 어우러지자 한 편의 시가 피어올랐다.

“모든 꽃은/ 피어날 때 신을 닮고/ 지려 할 땐 인간을 닮는다// 그 때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미스터리」 전문)

개인적 체험을 솔직하게, 그러면서도 문학적 언어로 승화시켜온 김상미 시인이 지난해 연말 신작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문학동네)를 들고 돌아왔다. 전작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가 나온 이후 5년 만의 신작으로,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시집에는 「미스터리」를 비롯해 개인의 체험과 경험, 사유가 솔직하게 담긴 시 57편이 담겨 있다. “그와 내가 닮은 점은 부서지고 가라앉으면서도 서로를 열렬히 원한다는 점”(「난파선」)이라는 시인의 성찰부터, “부러운 척, 탐나는 척 어머, 어머, 감탄사를 남발하며 아주 모던하고 담백한 척 건강미를 뽐내는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척, 즐거운 척, 황송한 척”(「포커 치는 개들」)하는 사람들의 위선과, “사악한 영혼, 싸구려 환상들이 푸른 나무들을 좀먹고 분노한 바다들이 다정한 배들을 삼키고 있”(「거기, 누가 있나요?」)는 세태에 대한 분노와, 다시 “내 팔자 또한 더럽게 춥고, 어둡고, 외롭고, 고달파도, 그들과 함께 계속 문학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뜨거운 피가 솟구친다”(「문학이라는 팔자」)는 운명의 자각까지 담긴. 작가는 「시인의 말」에서 “내 시가 꼭 오늘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몇백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의 이야기라 해도 설사 시가 아니라 해도 삐뚤삐뚤, 비틀비틀, 넘어지고, 엎어지면서도 나는 계속 시를 써왔다”고 적었다.

시력이 30년을 넘었지만 다섯 권의 시집만을 펴낸 김상미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도대체 무엇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문학적 행로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김 시인을 지난 13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우아하고 세련된 척하는 가구들과 전문가 뺨치는 오디오 시설에 영상 기기들까지 척, 척, 척 설치해놓고, 자랑스레 우리를 반기며 아주 행복한 척, 에로틱한 척 은밀한 침실까지 슬쩍 보여주었다. 우리는 부러운 척, 탐나는 척 어머, 어머, 감탄사를 남발하며 아주 모던하고 담백한 척 건강미를 뽐내는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척, 즐거운 척, 황송한 척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제각기 준비해간 선물 보따리를 풀며 마치 그들의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인 척 환하게, 환하게 웃다가,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걸려 있는 C. M. 쿨리지의 그림 「포커 치는 개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머머, 저 개들 좀 봐. 개들인 주제에 인간인 척 열심히 포커 게임 중이네... 우리도 저들처럼 신나게 포커나 한판 칠까? 그러자 쪼르르 카드를 가지러 가는 주인 부부. 하긴 오늘 우리가 척, 척, 척하며 그들에게 흔들어댄 꼬리만 해도 얼마냐. 졸지에 인간 아닌 척 신나게 포커 치는 개가 된다 한들....”(「포커 치는 개들」 부문)

―집들이를 통해 한국인의 세태나 위선을 서늘하게 묘파하는 것 같은데.

“오래전 새집을 새로 마련한 친구에게 초대를 받은 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그 집에 갔다 온 적이 있었다. 친구들을 폄하하려 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재미있게 쓰기 위해서 쿨리지 그림을 넣어서 당시 모습을 극화해 썼을 뿐이다.”

개인적 경험이나 사유를 담은 그의 시들은 여전히 솔직하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의 향기가 난다. “짝짓기는 외로운 사냥개, 표적이 잡히면 엄청난 즐거움에 울고 웃는 탐색전,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넋 잃고 빠져드는 함정 속의 함정, 연속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실수 속의 실수, 다시 한번, 또, 또.... 끝없이 펼쳐지는 황홀한 꽃밭 같지만 순식간에 무성한 잡초로 우거지는, 쓰디쓴 환상, 평생 동안 어마어마한 헛된 호기심 속에 탕진한, 짝짓기의 바벨탑, 그 아래에 뻥뻥 뚫린 맹목의 가슴을 부여안고도 새로운 짝짓기를 향해 손 내밀고 구걸하는 너와 나, 짝 잃은 사냥개들의 유일한 유원지, 유일하게 인간이 신의 기쁜 장난감이 되어 신의 손에 황망하게 놀아나는!”(「짝짓기의 바벨탑」 부문)

―연애를 노래한 이 시는 어떻게 나왔는지.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보통 이런 시를 쓴다. 마감이 다가오면 어쩔 수 없다. 먼저 짝짓기에 관계되는 모든 낱말을 머리에서 끄집어 쭉 쓴 뒤, 이것들을 연결해 시를 만든다. 이렇게 쓴 긴 시들은 리듬이 끊기면 안 되기 때문에 단번에 쓴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연애의 바벨탑이라고 하면 너무 유치해서 짝짓기로 표현했다. 그러면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이나 동물도 다 속하게 된다.”

2016~2017년 촛불항쟁의 일단을 보여주는 시도 포함돼 있다. 절대 권력의 앞과 뒤를 예리하게 묘파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당신의 진짜 얼굴은 어디에 있습니까? 수백만 송이송이 촛불들이 당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 달라고 외칩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아직도 어느 것이 당신의 진짜 얼굴인지 몰라 침묵 중입니다. 아니 우리에게 보여줄 얼굴이 없습니다. 당신은 한 번도 진실해 본 적이 없어 진짜가 무엇인지도, 그것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오로지 당신밖에 몰라 자신에게 말을 걸 줄도,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날마다 당신은 거울 앞에 앉아 당신 얼굴에 타인의 잔영이 조금이라도 비치기만 해도 참지를 못합니다. 당신의 눈은 이미 어떠한 배려도 없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매끄러운 당신의 심장 속에서 눈먼 지 오래, 그 눈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당신의 진짜 얼굴」 부문)

―촛불항쟁 당시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데.

“특정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권력 일반에 대한 이야기다. 권력의 앞뒤를 표현하고 싶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그때 북촌에 살았는데, 혼자 조용히 나갔다가 오곤 했다. 그때 사람들이 무척 친절했다. 시멘트 바닥이 차갑다고 자기 책을 꺼내서 앉으라고 했고, 커피를 사서 돌리는 이도 있었다. 따뜻한 것이 좋아서 한두 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오곤 했다.”

난파선처럼 가라앉으면서도 열렬하게 사랑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인의 사랑관도 솔직하게 담겨 있다. “그와 내가 닮은 점은/ 부서지고 가라앉으면서도/ 서로를 열렬히 원한다는 점이다// 사랑을 가지고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때/ 나약한 인간들은 자신을 거세하고/ 사랑의 통증이 헌신적으로 심신을 좀먹는 걸/ 그냥 두고 즐기지만// 세상엔 아무리 더럽히려 해도/ 더럽혀지지 않는 게 있다// 그것은 많은 배들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으면서도/ 바다를 결코 원망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와 내가 닮은 점도 그런 것이다// 끝없이 가라앉고 부서지면서도/ 서로를 열렬히 원한다는 것”(「난판선」 전문)

―대담한 사랑관이 아닐 수 없다.

“젊었을 땐 연애를 좀 했다. 피가 뜨거웠으니까.(웃음) 사람들은 저보고 순정파라고 하더라. 사랑뿐만 아니라, 저의 모든 게 그렇다. 별로 후회하지 않고, 잘못했으면 바로 그때 인정하고 사과한다. 이런 것이 난파선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해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을 보고 조금 부러웠다. 그의 작품에는 현 세태나 정치적인 것도 다 담겨 있다. 그녀의 가장 놀라운 작품은 『사진의 용도』였다. 젊은 작가와 사귄 그녀가 격정적인 정사를 끝낸 뒤, 그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쓴 글이다. 남을 파고드는 것은 쉽지만,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파고드는 건 어렵다. 그런 점에서 최승자도 용감했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힘들 때마다 자신보다 앞서 불행한 삶을 살다간 예술가들의 책을 들여다보곤 했다. 팬데믹이 휩쓸던 절망의 그 시절에도. “나는 내가 나 같지 않고, 삶이 삶 같지 않고, 문학이 문학 같지 않고, 친구나 동료가 친구나 동료 같지 않고, 내가 알던 정의신념가치사랑 같은 숭고한 단어들이 내가 모르는 비릿한 단어들로 변해 세간에 마구 유통될 때, 내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져 온몸과 온 마음의 비통과 회한뿐일 때, 이 여덟 명의 작가들을 만나러 간다. 그들의 팔자를. 문학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더럽게 불운하고, 더럽게 치열하고, 더럽게 품격 있고, 더럽게 자존이 강했던 그들의 팔자. 나 자신이 위로받으러 갔는데, 오히려 내가 감화되어 울고 나오게 되는 그들의 팔자. 그런 팔자임에도 그 지독한 불운과 죽음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들의 문학. 그 시퍼런 도끼날의 세례를 받고 오면, 내 팔자 또한 더럽게 춥고, 어둡고, 외롭고, 고달파도, 그들과 함께 계속 문학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뜨거운 피가 솟구친다. 그 어떤 곳보다도 팔자 사나운, 문학이라는 한 장소에서, 동시에!”(「문학이라는 팔자」 부문)

―문학이 고통과 희망을 함께 주는 것 같다.

“팬데믹이 휩쓸면서 힘들고 절망적인 상태였다. 조금씩 벌어서 살아왔는데, 수입이 다 끊기고 힘들었다. 몸의 균형이 깨지면서, 머리도 빠지고 온몸에 영양 불균형 증세가 나타나더라. 절망할 때마다 위로를 받기 위해 랭보를 비롯해 불행하게 살다간 예술가들의 책을 다시 보곤 했다. 이들은 불행하게 살았지만, 문학적으론 대단했다. 한 3년 전쯤 쓴 것 같은데, 이 시는 2021년 부산영화제에 상영된 김전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시인들의 창>에 나오기도 한다.”

시집에는 많은 시인과 시인의 삶이 나온다. 백석과 황지우를 비롯해 시의 시대였던 19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 중 한 명인 최승자 시인을 노래한 시도 있다. “저 멀리 바람 부는 언덕 위로/ 그녀가 걸어간다.// 최승자 시인.// 그녀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내 마음에서 한 번도 멀어진 적이 없다.// 오랫동안 남자들의 시선에 지배 감금당했던 시를/ 과감히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만의 목소리로/ 뜨겁고 명료하고 대담한 여성 시를 창조한 시인.// 그 시들이 조금씩 그녀를 좀먹고/ 급기야는 통째로 그녀를 삼키려 들 때도/ 언제나 두려움 없는 그녀의 그물 가득 반짝이던/ 아주 쓰지만 아주 명료하고 독창적인/ 그녀의 시들.// 남몰래 그 시들을 잠 못 이루는 내 오르골에 담아/ 좋아라, 좋아라, 읽고 또 읽었던/ 내 문학의 오랜 영양수,/ 최승자 시인.// 그녀가 저 멀리 바람 부는 언덕 위를/ 홀로 걸어간다.// 멀리에서 바라만 보아도 빈 배처럼 우아하고/ 드넓은 평원에 핀 야생화처럼/ 너무나도 자유로운!”(「최승자 시인」 전문)

―최 시인과는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특별한 인연은 없고, 아주 좋아하는 시인이다. 어느 잡지사에서 1970년대 이후 활동한 시인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시인에 대한 시를 써달라는 청탁이 와서 쓴 시다. 최승자 시인을 만난 건 세 번뿐이다. 처음 본 건, 1990년대 중반쯤 어떤 모임에서였다. 두 번 째 본 건, 어느 모임 입구에서다. 최 시인이 박남철 시인과 함께 있었는데, 인사를 했더니, 최 시인이 네가 김상미냐? 너 시 잘 쓰더라고 말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내 시를 읽고 있었다는 게 무지 기뻤다. 세 번째는 2010년 최 시인이 처음으로 지리산문학상을 받았을 때 축하하기 위해 함양까지 내려가면서 이뤄졌다. 이때는 조금 대화를 나눴다. 처음 아주 똑똑하고 명료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단독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 시인이 2010년대 ‘천년의시작’에서 시집을 낼 때 그 원고를 제가 타이핑했다. 아무것도 아닌 문장 같아도 이상하게 공간들이 확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언어를 적재적소에 잘 배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청 시절 즐겨 읽었던 여성 시인으로는 최승자, 김혜순, 김승희, 강은교 등이 있었다. 남성 시인으론 김소월이나 이상, 백석, 김수영, 윤동주 등을 좋아했다. 김소월은 언어의 운율을 기차게 잘 만들었다.”

창단 30년이 넘는 시인축구단 ‘글발’의 회원인 그는 메시와 FC 바르셀로나 축구를 사랑한다. “축구는 발을 위한 경기. 현재 나의 발은 리오넬 메시의 발. 그는 바르셀로나의 살아 있는 레전드. 두 발의 문명, 두 발의 종교다. 그는 이곳에서 317경기를 뛰고 286골을 넣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공을 막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다. 축구는 창작이다. 두 발로 쓰는 시. 나는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축구공과 함께 달리는 그들의 군무. 그 놀라운 육체노동! 그들의 존엄성은 언제나 골인과 함께 더욱 빛이 난다. 골인! 골인! 그리고 또 골인!”(「FC 바르셀로나」 부문)

―지난 카타르월드컵에서 메시의 아르헨티나가 우승했는데.

“메시를 좋아한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새벽에 일어나서 메시가 뛰는 바르셀로나 경기를 보곤 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가 우승해서 좋다. 시인 축구팀도 창단 30년을 넘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경기를 한다.”

―시집 표제 ‘갈수록 자연이 되는 여자’의 의미는.

“독버섯을 먹어도 죽지 않는 것처럼,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가 되고 싶다. 자연의 본성대로 자기를 위해 사는데도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피해를 안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종의 단독자처럼.”

―이번 시집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서울문화재단 지원을 받아서 3년 안에 시집을 출간해야 했는데, 좀 늦었다. 초교를 보고서 조금 울었다. 의도한 건 아닌데, 힘들 때 쓴 시들이 많아 꼭 내 자서전을 보는 듯했다. 시인으로서의 자세, 문학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내 이야기와 아우러져 약간의 정리가 된 느낌이다.”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한 여동생(김점미 시인)이 교사 발령이 늦게 나는 바람에 잠시 서울의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때 서른을 갓 넘은 김상미는 1988년 여동생의 밥을 해주겠다며 상경했다.

당시 그는 에른스트 얀들을 비롯해 독일 구체시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누가 숲으로 오는가/ 누가 여늬 때처럼 서 있는가/ 누가 여늬 때와 달리 서 있는가”(「숲」)라는 표현처럼, 얀들의 시는 역동적이었다. 마치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자신이 써온 시들이 시시하게 느껴져 한동안 시를 쓸 수 없었다. 그는 이때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이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밀란 쿤데라의 『농담』 등 새로운 세계문학을 접했다.

그의 삶은 늘 시와 문학 언저리를 배회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시집인 줄도 모른 채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을 좋아했고, 학급 문집을 도맡아 만들었으며, 글짓기 대회에서 자주 상을 받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문예반에 들어가 교지 제작에 적극 참여했고, 토요일마다 차비를 아낀 돈을 모아 민음사의 세계시인선 시집을 사서 읽곤 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부산 사상의 제2공장에 들어갔을 때에도, 중앙동의 작은 사무실에서 경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읽었고, 틈나는 대로 일기를 썼으며, ‘영남 여성백일장’과 이듬해 부산시민의 날 백일장대회에서 연달아 시 부문 장원을 차지한 그녀였다.

여동생은 머지않아 부산으로 내려갔지만, 그는 계속 서울에 머물렀다. 어느 날 방배동의 낚시판매 회사에 취직했다. 직원들이 판매를 위해 밖으로 나가면, 그는 혼자 사무실을 지켰다. 사무실에는 전동 타자기 한 대가 있었다. 사무실에 사람들이 없을 때면, 그는 전동타자기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 편, 두 편, 세 편...열일곱 편.

시가 쌓여가자, 그는 정식으로 등단한 뒤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학창시절 늘 교지를 만들어 왔기에 편집에 자신이 있었다. 서울 시내 서점으로 나가 잡지들을 살펴봤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승훈, 정현종, 최승호 시인이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던 새 문예지 『작가 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쓴 시들을 『작가세계』에 투고했다.

1957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상미는 1990년 「그녀와 프로이트 요법」 외 7편의 시를 문예지 『작가세계』에 제1호 신인으로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그의 나이 만 서른셋.

등단 이후 그는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등을 펴냈다. 박인환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 세계를 조금 소개해 달라.

“첫 시집은 좀 드라이한 경향이 있었다. 가급적 감상을 배제하고 언어만으로 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단어를 많이 모으는 편이었다. 그러다 점점 제 이야기나 주변의 이야기를 녹여 썼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공적인 차원으로 전환하여 생의 진실과 비밀을 마주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저는 시에 담긴 이야기나 메시지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지 묘사나 사물 묘사에 능한 시인들이 많으니까, 저는 이야기(삶)를 쓰려고 한다.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들까지도.”

―시 창작의 방식이나 원칙이 있다면.

“사람들이 제 작품을 읽을 때 쫀득쫀득하고 재미있으면 좋겠다. 재미있고 유머가 있으며 재치가 있어야 한다는 호라티우스의 시론을 좋아한다. 운율과 위트, 지혜 같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단어를 적재적소에 잘 쓸 수 있고, 효과를 위해 어떤 문장을 밀어내거나 붙이면서 재미를 추구한다. 슬픔조차도 재미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재미주의자다. 긍정적인 사람이어서 우울한 것보다 명랑한 편이다. 저는 스승이 없는데, 화가를 좋아한다. 화가들의 인터뷰나 자서전을 통해 화가들의 그림 그리는 법에서 시 쓰는 법을 배운다. 제 시를 읽고 그림이 펼쳐진다는 말을 듣는데, 그런 것을 화가들에게서 배웠다. 문장 하나하나에 터치를 준다. 다른 시인들은 묘사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저는 언어로 영화처럼 영상이 떠오르도록 노력한다.”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고, 독자들에게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나이가 60을 넘으니까 시 쓰는 게 좋더라. 최근 이사 레슈코의 사진집 『사로잡는 얼굴들』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농장과 동물원 등에서 갇혀 있던 동물들이 일종의 ‘요양원’인 생추어리에서 평화롭게 보내는 마지막 순간을 담은 사진집이다. 야생동물과 달리 농장 동물들은 늙어서 죽는 동물이 없다고 하더라. 우리를 위해 알을 낳다가 죽기도 하고 고기를 위해 도살된다. 사라져가는 동식물과 사물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 대한 시를 쓰고 싶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시인이 되고 싶다.”

―요즘 일상은 어떤지.

“그동안 교정 프리랜서로 오랫동안 밤늦게 일해 왔다. 그 여파로 일찍 자면 오전 6시쯤 일어나고, 늦게 자면 오전 9~10시쯤 일어난다. 지금 건강은 나쁘지 않다. 생활 역시 평범하다. 책 읽고, 글 쓰고, 산책한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 전시도 좋아하고, 축구 경기 보는 것도 좋아하고.”

문학소녀와 등단 시인으로 각각 부산과 서울에서 30년씩 살아온 시인 김상미는 이제 새로운 노년의 30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앞의 두 시기와 달리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고, 그는 소망했다. 아마 그 안에는 있을 것이다. 정독도서관의 동아리 모임도, 시인축구단 ‘글발’도, 특히 아드레날린을 있는 대로 발기시키는, 절망에 눈이 먼 채로 허기지고 굶주린, 죽기 전까지 결코 놔주지 않을 그 놈의 시도.

“그러나⋯ 그럼에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대로 입히고 먹여줄 게 시밖에 없어/ 뜬구름 잡듯 또다시 펜을 집어 든다// 이 우주에 시 아닌 것 있으면 나와 보라고/ 절망에 눈이 먼 채로 큰소리치며// 돈키호테가 풍차를 들이받듯 용감하게/ 있는 대로 아드레날린을 발기시키며/ 허기지고 굶주린 시 속으로/ 미치고 미치다 꺼꾸러진 희디흰 뼛가루/ 그 위에 던져진 한 떨기 백합처럼/ 결코 나를 놓아주지 않을 시 속으로....”(「시인 앨범 7」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이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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