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피랍은 그저 옛일일까…아픈 기억 되살린 ‘교섭’
정부의 여행 자제 권고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에 단기 선교를 갔다가 탈레반에 납치된 한국의 한 교회 신도 23명. 18일 개봉하는 영화 <교섭>은 2007년 여름 온 국민을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은 이 사건을 다룬다.
민감한 소재다.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선교단의 무모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향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경고를 무시한 이들의 구출 협상에 정부가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하지만 자국민 보호가 첫째 임무인 국가 공무원들에게 이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테러리스트와 협상해선 안 된다는 외교 원칙과 자국민을 무사 귀국시켜야 하는 책임, 그리고 인질극이 더 많은 희생을 낳는 확전의 도화선이 되는 걸 막아야 하는 딜레마에 놓인 주인공. 여기에 주어진 건 단 24시간. <교섭>은 팽팽한 평행선에서 합의점을 찾으려는 외교부 공무원과 국정원 직원의 숨 막히는 인질 구출 협상의 과정을 그린 영화다.
피랍 소식이 알려지자 교섭 전문가인 외교부 실장 정재호(황정민)는 차관, 실무자들과 급하게 아프간 수도 카불에 간다. 하지만 냉담한 아프간 정부와 우리 정부의 원칙,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자살 폭탄 테러와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열악한 현지 상황에 망연해진다. 한편, 여기서 만난 국정원 중앙아시아 담당 요원 김대식(현빈)은 현지 사정에 훤하지만 인질 구출 방식에 이견을 보이면서 두 사람 간 긴장의 끈도 팽팽해진다.
입국이 불가능한 아프간 대신 요르단에서 현지 촬영을 한 <교섭>은 순제작비 150억원이 투입된 대작 영화다. 웅장하면서도 황량한 중앙아시아 사막과 자살 테러단이 벌이는 대규모 폭발 장면, 뛰어난 전투 능력을 지닌 대식의 오토바이 추격전 등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교섭>의 알맹이는 눈이 시원한 볼거리보다는 원칙주의자 재호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대식 간의 대립, 끝내 협상 테이블에 앉은 재호와 탈레반 사령관 사이의 일촉즉발 긴장감이다. 테러와 인질극이라는 소재를 가져오면서도 희생자들이 순식간에 불태워지는 종이 인형처럼 소비되면서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르극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16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임순례 감독은 “죽이는 장면은 운전기사 딱 한명 나오는데, 처음에는 그것도 넣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며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는 액션, 총을 쏘거나 사람을 죽일 때 이유가 있는 액션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제보자> <리틀 포레스트> 등 다양한 영화를 찍어오면서 휴머니즘이라는 주제 의식을 놓지 않았던 임 감독의 첫 대작 장르극이 다른 질감으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다.
<교섭>은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로 영화계에 얼굴을 알린 황정민과 임 감독이 22년 만에 다시 만난 작품이기도 하다. 황정민은 이후 많은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했지만 <교섭>에서 그가 보여주는 반듯한 원칙주의자는 애초 그를 발굴해낸 임 감독이 새롭게 뽑아낸 황정민의 또 다른 얼굴이다. 반면 반듯한 역할 전문이었던 현빈은 인질 구출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거칠고 뜨거운 인물로 자리를 바꿨다. 노련한 두 배우의 자리바꿈과 역할 분담은 <교섭>을 힘 있게 끌고 가는 두 축이다.
그 사이에서 영화의 숨 고르기를 담당하는 ‘카심’ 역의 강기영도 빼놓을 수 없다. 과거를 알 수 없지만 카불의 뒷골목을 전전하며 아프간 파슈토어를 통역하는 카심(한국 이름 이봉한)은 한정된 시간에 쫓겨 다급한 상황에서도 특유의 능청스러운 기질로 웃음을 준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정명석 변호사 역으로 뜨기 전 이 영화를 촬영했는데,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의 조우진처럼 주인공들에게 밀리지 않는 신스틸러 구실을 톡톡히 한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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