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마우스, 손선풍기…고장나도 고쳐 쓸 수 없나요?
고장 난 전자제품을 고치는 데 새로 사는 것보다 돈이 많이 들거나, 부품이 없어 고치지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줄어들 전망이다. 지난달 31일 공포된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에 관련 근거가 담긴 데 이어 환경부가 올해 안에 시행령 초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수리권은 말 그대로 ‘제품을 고쳐서 쓸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국내에선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유럽연합과 미국을 중심으로는 논의가 활발하다. 시민단체들이 소비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수리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각국 정부도 관련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특히 최근 전자제품 소비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전자폐기물에 있는 납, 망간 등 때문에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수리권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다. 수리권에 대한 요구는 전자제품과 가전제품뿐 아니라 의료기기, 농기계 등 생활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트랙터 자가수리 좋다” 농민과 양해각서
지난 8일(현지시각) 미국의 농기계 제조업체 디어앤코는 농민들이 자사 제품을 직접 수리하거나 시설 기술자에게 수리를 맡길 수 있도록 하는 양해각서를 미국농민연맹(AFBF)과 체결했다. 공인 업체를 통해서만 수리하도록 하고, 자체적인 농기계 수리‧개조를 엄격하게 금지했던 과거에 견줘 진일보한 것이다. 이번 양해각서 체결은 미국 다수 주에서 수리권과 관련된 법률이 논의되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뉴욕주는 지난해 말 전자제품에 수리 정보 등을 제공하도록 하는 ‘디지털 공정수리법’ 입법 절차를 마치고 오는 7월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앞서 2021년 7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자가수리권 보장을 위한 행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이미 미국에서 삼성전자, 애플, 구글 등은 미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자가수리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프랑스는 2021년부터 분해 용이성 등의 지표로 이뤄진 ‘수리 가능성 지수’ 표시를 의무화하도록 했다.
국내에서도 수리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환경연합은 지난해 10월15일부터 전자제품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수리권을 보장하라는 온라인 서명운동을 벌였는데, 지난 16일 기준 387명이 참여했다. 앞서 서울환경연합이 지난해 7월8일부터 8월8일까지 한 달간 전자제품 수리 실패 사례 111건을 접수해 조사한 결과, 부품이 없거나 수리비가 비싸서 수리하지 못한 사례가 다수 있었다. 텔레비전, 세탁기, 노트북, 프린터, 전자사전 등 48개 품목을 수리하지 못한 이유로 ‘부품이 없어서’(42건), ‘수리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거나 업체에서 거절해서’(28건) 등의 답변이 나왔다. ‘새로운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더 저렴하거나 사용하기 더 좋으니 새로 구매하라’고 제안받았다는 사례도 17건이나 됐다. 수리비가 너무 비싸거나, 업체에서 수리 대신 제품교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례도 있었다.
수리권은 대선 공약과 국정과제로도 등장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소비자 수리권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바 있다. 전자·가전제품의 수리용 부품 보유 의무 등을 확대해 탄소를 줄이자는 취지였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해 5월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며 소비자의 수리권 보장 등을 담은 순환경제전환촉진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국내선 마우스, 무선 이어폰 수리 못해”
이런 논의가 이어지자 환경부는 지난 3일 올해 업무보고에서 핸드폰, 가전제품 등 주요 제품의 사용주기 연장을 위해 수리 가능성 등급제와 수리권 보장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자원순환기본법을 전부 개정해 지난달 31일 공포한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에도 관련 내용을 담았다. 이 법 제3조2항은 사회 모든 구성원이 순환경제사회로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원칙으로 ‘내구성이 우수한 제품의 생산 및 제품의 수리 등을 통해 제품의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폐기물의 발생을 최소화할 것’을 제시한다.
이 법 제20조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제품을 생산하거나 수입할 때 조기에 폐기되지 않고 수리돼 사용될 수 있도록 수리에 필요한 예비부품의 확보, 예비부품 배송 기한 등에 대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을 준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밝힌다. 다만 제20조는 2025년 1월1일부터 시행되고, 아직 해당 제품이나 관련 기준 등이 대통령령으로 정해지지 않아 논의 초기 단계다. 17일 서영태 환경부 자원순환정책과장은 “올해 상반기 안에 대통령령으로 정할 내용의 초안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산업계 등 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정은 서울환경연합 활동가는 “국내에서 휴대폰 등은 비교적 수리하기 쉽지만, 선풍기, 휴대용 손선풍기, 마우스, 무선 이어폰 등은 부품이 없어서 수리가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리와 관련된 권한을 기업에만 맡겨두면 소비자는 제품을 더 오래 쓸 권리를 잃게 되는 것”이라며 “관련 기준을 세부적으로 마련해 수리권을 폭넓게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주 기자 k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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