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공항 사람들] ⑩하늘길 등대 제주항공무선표지소 "안전운항 우리 손에"
폭설로 13일간 직원 홀로 고립 "그래도 하늘길 지켜"
[※ 편집자 주 = '공항'은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충만한 공간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주공항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 의미가 각별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을 지나 엔데믹(endemic·풍토병으로 굳어진 감염병)으로 이어지는 이 시대에도 '쉼'과 '재충전'을 위해 누구나 찾고 싶어하는 제주의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연간 약 3천만 명이 이용하는 제주공항. 그곳에는 공항 이용객들의 안전과 만족, 행복을 위해 제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비록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며 제주공항을 움직이는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 이야기와 공항 이야기를 2주에 한 차례씩 연재합니다.]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하루 평균 1천500편의 항공기가 이동하는 제주의 하늘.
표지판도 신호등도 없는 하늘에서 항공기들은 어떻게 사고 없이 길을 찾아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안전한 항공기 운항을 위해 하늘의 등대 역할을 하는 제주항공무선표지소를 찾았다.
제주표지소 근무자들의 역할과 고충을 18일 알아본다.
24시간 조종사와 관제사의 눈과 귀 역할
지난 11일 오후 한라산 탐방객들의 쉼터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성판악 탐방안내소.
그 맞은편 버스정류장 옆으로 난 좁다란 길목을 따라 1㎞가량 깊숙이 들어가면 '제주항공무선표지소'(이하 제주표지소)가 나온다.
해발 850m 물오름 정상에 위치한 이곳은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공간이었다.
굳게 닫힌 철문을 지나 보이는 단층짜리 건물과 여러 안테나는 마치 국토 최전방을 지키는 소초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고철승 제주항공무선표지소장의 안내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서자 바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커다란 등대 모양의 구조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주표지소의 핵심 시설인 '항행안전무선시설'(VOR/TACAN)이다.
항공기 운항에 필요한 방위와 거리정보를 제공하는 시설로, 바다에 뱃길을 알려주는 등대가 있듯이 하늘길을 알려주는 '하늘의 등대'이자 '조종사의 눈' 역할을 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기둥 부분이 전술항행표지시설(TACAN)이다. 민항기에 거리정보를, 군용기에 거리·방위정보를 제공한다. 한국공항공사가 직접 개발, 해외에 수출하는 국산 장비다.
기둥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바둑알 모양의 기기는 전방향표지시설(VOR)로, 민항기에 방위정보를 제공한다.
1층으로 내려가 제주표지소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어디에선가 무선통신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제사와 비행기 조종사 간 실제 교신 내용으로, 표지소 안 항공이동통신시설(AG)이 교신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옆 방에는 항공기 경로 추적 사이트 '플라이트레이더24'와 같은 자동종속감시시설(ADS-B)이 눈에 띄었다.
항공기에서 1초 간격으로 보내는 위치, 고도, 속도 등 다양한 항적정보를 받아 다시 관제사에게 전달하는 장비다.
고철승 소장은 "AG는 거리제한이 있기 때문에 제주표지소 근처의 항공기하고만 통신이 가능하다. 그래서 항공기가 이동하는 우리나라 곳곳에 항공무선표지소가 위치해 있다"고 설명했다.
고 소장은 "표지소들이 비행기 조종사와 관제사의 눈과 귀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비행기들이 부딪히지 않고 서로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주표지소는 이렇듯 다양한 장비와 시설을 통해 얼마나 많은 비행기에 관제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까.
2019년 하루 평균 1천534편의 항공기에 관제 서비스를 제공했으나, 코로나19 이후 항공기 운항 횟수가 줄어 2022년 상반기에는 서비스 제공 횟수가 하루 평균 755편으로 50.8% 감소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제선 운항이 재개되면서 점진적으로 회복추세를 보이고 있다.
전국에는 제주를 비롯해 안양·송탄·양주·강원·부산 등 10곳에 한국공항공사가 운영하는 항공무선표지소가 있다.
모두 항공로 관제업무에 필요한 음성통신 서비스와 레이더 항적자료를 제공하며, 각종 장비를 관리하는 중요한 임무를 24시간 수행한다.
폭설과의 사투…"하늘길 안전관리 최선"
"폭설이 심할 때는 출입구가 완전히 눈에 덮여버리기도 했어요."
겨울만 되면 제주표지소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폭설과 사투를 벌이곤 한다.
항공기 운항에 필요한 신호를 보다 효과적으로 송수신하려다 보니 제주표지소는 한라산 자락 해발 850m 물오름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겨울철 제주도심이나 해안가에는 눈이 오지 않더라도 한라산에는 폭설이 내리는 경우가 많다.
제주표지소 근무자 6명은 평상시에는 주간에 3명, 야간 1명, 공휴일 1명으로 나눠 근무하는데 폭설시에는 바로 비상근무 체제로 전환한다.
기상과 도로 여건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가능하다면 바로바로 근무를 교대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버스가 다니기라도 하면 교대할 수 있지만, 폭설로 차량이 완전히 통제되면 근무자는 말 그대로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인다는 점이다.
기상 특성상 한밤중 많은 눈이 쏟아져 다음날 새벽부터 차량이 통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되면 보통 야간 근무자 1명이 홀로 계속해서 근무하는 수밖에 없다.
지난 2006년 12월 당시 제주표지소 사상 최대인 3m의 적설량을 기록, 근무자 1명이 13일간 고립된 적이 있다.
또 2018년 2월 폭설 때도 근무자 1명이 5일간 '나 홀로 근무'를 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근무자는 관제업무에 필요한 각종 장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홀로 하루 24시간 관리하고, 제설작업도 해야만 한다.
동료 직원들은 고립된 직원과의 교대를 위해 가능하다면 차를 한라산 중턱에 세워두고서라도 눈길을 뚫고 10㎞를 걸어가기도 한다.
직원들은 매우 낙천적이다.
'고립생활로 나날이 요리실력이 늘었다'라거나 '제설작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이어트가 된다'며 매사에 긍정적으로 업무를 한다.
웃지 못할 해프닝도 생긴다.
한라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을 때는 성판악 탐방안내소 주차장이 모자라 인근 도로변이 주차장으로 변하곤 하는데, 간혹 제주표지소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차를 세워놓고 통로를 막아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퇴근을 못 하는 직원이 전화하면 한라산 진달래밭이라 바로 내려갈 수 없다는 무책임한 답변이 돌아오기도 한다.
고철승 소장은 "열악한 환경 속에 표지소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하고 있지만, 항공기 승객들이 안심하고 행복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더욱 안전한 하늘길 관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b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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