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리뷰]강렬한 미장센으로 그려낸 경성 첩보액션 '유령'

CBS노컷뉴스 최영주 기자 2023. 1. 18.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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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유령'(감독 이해영)
영화 '유령' 스틸컷. CJ ENM 제공

※ 스포일러 주의

탄탄한 스토리 속 인상 깊은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던 이해영 감독이 다시 한번 자신의 장기를 발휘했다. 일제강점기 경성을 무대로 한 '유령'은 장르물이 가진 특성을 잘 살리면서 동시에 터질 것 같은 뜨거움을 차갑게 품은 캐릭터들, 특히 '여성'이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1933년, 일제강점기 시대 경성. 항일조직 흑색단의 스파이인 '유령'이 비밀리에 활약하고 있다. 새로 부임한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는 흑색단의 총독 암살 시도를 막기 위해 조선총독부 내의 유령을 잡으려는 덫을 친다.

영문도 모른 채 유령으로 의심받고 벼랑 끝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는 모두 다섯 명.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 무라야마 쥰지(설경구), 암호문 기록 담당 박차경(이하늬), 정무총감 비서 유리코(박소담), 암호 해독 담당 천 계장(서현우), 통신과 직원 백호(김동희)다.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유령은 기필코 살아 나가 동지들을 구하고 총독 암살 작전을 성공시켜야 한다.

영화 '유령' 스틸컷. CJ ENM 제공

'유령'은 '천하장사 마돈나' '페스티발'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독전'을 통해 색다른 이야기와 인상 깊은 캐릭터를 그려냈던 이해영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다. 영화의 원작은 중국 작가 마이지아(風聲·본명 蒋本浒)가 쓴 장편 서스펜스 소설 '풍성'(風聲)으로, 소설은 중국에서는 TV 드라마와 영화로 여러 차례 각색될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무대를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져온 '유령'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마치 커다란 밀실이라 할 수 있는 외딴 장소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추리극 같은 느낌을 준다. 보통의 미스터리 추리극이 범인을 숨기고 이를 추리해가는 과정에서의 긴장을 포인트로 한다면, '유령'은 처음부터 유령이 누구인지를 알려준 후 다른 방식의 긴장을 자아낸다.

감독이 선택한 관객과의 줄다리기 방식은 영화 시작에 알려준 유령이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을지, 과연 일본군(경무국 경찰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무사히 밀실을 빠져나가 흑색단을 구할 수 있을지 하는 긴장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밀실에 모인 다섯 명이 서로를 의심하는 동시에 이들의 의심스러운 언행을 보며 자연스럽게 혹시나 또 다른 유령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새로운 추리를 하게 된다.

영화 '유령' 스틸컷. CJ ENM 제공

유령의 존재가 모두에게 발각되고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온 후부터는 본격적인 '경성 첩보극'이 진행된다. 전반부가 두뇌 싸움이었다면, 후반부는 몸싸움, 즉 액션 위주의 본격적인 첩보 액션으로 공간을 누비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첩보극에 들어선 감독은 리얼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액션을 보여주는데, 인물들의 액션 스타일은 누아르나 웨스턴 장르의 느낌도 담고 있다. 또한 인상 깊은 지점 중 하나는 많은 여성 액션 캐릭터를 다루는 영화에서 범하는 실수인 '여성성' 내지 과도한 '감정선'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령'은 여성 캐릭터가 액션물의 중심에 서서 끌고 갈 때는 남성과는 다른 액션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처럼 이상한 여성성을 강조하는 잘못된 여성 액션의 길을 걷지 않는다. 감독은 이상한 방향성에서 벗어나 오롯이 '액션'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에 박차경도, 무라야마도 모두 성별을 떠나 가차 없이 맞붙는다. 서로를 향한 주먹에 담긴 힘은 성별을 떠나 지켜야 하는 사람과 증명하고자 하는 사람의 치열함이 담겨 있다.

영화 '유령' 스틸컷. CJ ENM 제공

이렇듯 박차경에서 시작한 액션은 유리코로 이어진다. 유리코 역시 거칠고 단단한 액션을 선보이며, 굳이 강조하자면 '여성' 액션 캐릭터가 가야 할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영화 속 두 여성 캐릭터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인물도 아니고, 어설프게 신파를 자아내는 동지애로 엮인 관계가 아니다.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면서도 처절한 연대를 보이는 인물들이다. 그렇게 유리코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박차경과 연대하는 순간, 영화는 여성들의 버디 무비의 성격까지 갖추게 된다.

'유령'은 영화가 가진 시대적 배경이나 이야기만큼이나 미장센 역시 묵직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스타일을 유지하며 끝까지 나아간다. 시대적 배경을 영화의 색감과 질감, 톤 앤 매너를 담아 묵시록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긴장의 찰나를 슬로우로 잡아내는 클로즈업 장면들은 단순히 미장센만이 아니라 이후 인물이 사건을 풀어나가는 열쇠들로 작용하기에 이러한 요소들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영화 속 캐릭터 간의 시선을 통해 강약을 드러낸다. 조선 총독이 경호대장을, 일본인이 조선인을, 스스로 일본인으로서 정체성을 다시금 굳힌 무라야마가 다른 조선인을, 이런 식으로 영화 내내 강자가 약자를 내려다본다. 이러한 시선의 지점에서 약자였던 유령들이 영화 마지막 총독을 바라보는 위치가 바뀐 것을 볼 때, 조선이 일본의 치하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망언이 빗나갈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유령' 캐릭터 포스터. CJ ENM 제공

이 모든 상황과 진행에서 감독의 연출이나 배우들이 인물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그려가는 과정에는 '차가움'과 '뜨거움'이 공존한다. 정확히는 뜨거운 내면을 차가움으로 애써 부여잡고 있는 형태다. 각자의 서사와 다양한 감정이 각 캐릭터 안에서 들끓지만, 이를 외적으로 강하게 표출하지 않는다. 영화의 톤 앤 매너 역시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다. 다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지나치게 어둡고 묵직한 톤으로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점은 양날의 검이다.

'유령'은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유령과 유령을 둘러싼 캐릭터들이 돋보인다. 대척점에 서서 혹은 연대하며 멋진 액션을 선보인 설경구, 이하늬, 박소담은 연기로서 영화와 시대가 가진 무게감은 물론 캐릭터의 이면까지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특히 이하늬와 박소담은 스크린에서 다시 한번 액션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남겼다. 이들 외에도 박해수와 서현우 역시 자신의 캐릭터를 한껏 살리며 존재감을 입증했다.

영화 초반을 열며 관객들을 순식간에 스크린으로 집중시키는 이솜의 연기가 준 인상은 영화 마지막까지도 관객들의 마음에 자리잡는다. 이처럼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해서 표현했는지, 그리고 이들의 앙상블이 어떤지 살펴볼 수 있는 것 또한 '유령'의 매력 중 하나다.

132분 상영, 1월 18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 '유령' 2차 포스터. 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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