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1㎏에 3만원’ 무게로 팔리는 옷... 불황의 이면
‘맨투맨 티셔츠 2개, 면바지, 목폴라’ 다 사도 4만원
“택(가격표) 가격 X. 무조건 1㎏ 3만원”
15일 오후 10시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스트릿 패션 매장 엠플레이그라운드 홍대 4호점. 이곳은 홍익대 근처 최대 번화가 중 한 곳으로 술집과 노래방, 오락실, 카페 등이 밀집해 젊은 층이 많이 찾는 큰 길가에 위치해 있다.
‘폐업’이란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는 이 매장에서는 옷을 1㎏에 3만원, 초과 100g당 3000원으로 정해서 팔고 있었다. 옷마다 달린 가격표와 관계 없이 바구니에 담아서 무게를 재고 옷을 사는 ‘킬로그램 세일’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옷을 바구니에 담고 저울에 달아보는 20·30대 손님들로 북적였다. 이 곳을 찾은 이정현(32)씨는 “옷을 무게로 파는 건 처음 봤다”며 “여자친구와 함께 입을 맨투맨 티셔츠 2개, 면 바지, 목폴라를 4만원에 샀다”고 말했다.
◇낮이고 밤이고 북적...헌옷 수거 때와 비슷한 방식
17일 오후 12시에 다시 찾은 이 매장은 여전히 옷을 고르러 분주히 다니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앳된 얼굴의 손님들은 매장 곳곳에 비치된 저울 위에 옷을 올렸다가, 덜기도 하고 더하기도 하면서 무게를 맞추고 있었다. 조성문 엠플레이그라운드 4호점 부매니저는 “1월 1일부터 세일을 했는데, 초반에는 1층과 지하 1층이 손님들로 꽉 찼었다”고 말했다.
엠플레이그라운드 본사 관계자는 “지난해 전년 대비 50% 이상의 매출 성장을 이뤘고, 공격적인 마케팅 방식으로 킬로그램 세일을 채택한 것”이라며 “경영 전략에 따라 매장을 인근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매장 계약기간 만료로 폐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킬로그램 세일의 인기가 불황 속 합리적 소비를 하려는 심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입을 모은다. 폐업 전 세일해서 옷을 저렴하게 파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지만, 기존 가격을 무시한 채 옷의 ‘무게’만 재서 파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헌 옷, 팔리지 않은 새 옷 등 구매처를 찾지 못한 의류를 의류 수거 또는 소위 땡처리 업체들이 가져갈 때 1㎏당 금액을 매겨서 사가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간편 헌옷 방문 수거 서비스 ‘리클’은 헌옷 매입 단가를 1㎏당 200~500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홈쇼핑 매출 채권을 담보로 소규모 의류 회사에 자금을 빌려줬던 한 금융회사 대표 A씨는 “의류를 긴급하게 처분해야 하는 경우 브랜드 인지도가 없는 옷이라면 원래 가격이 장당 10만원, 20만원이었든, 새 옷이든 헌 옷이든 따지지 않고 자루에 넣어서 무게를 달아 팔고 값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백화점까지 진출한 중고 의류 매장... 의류 소비 위축
중고 의류 구매가 활성화되는 것도 경기 불황의 징조로 해석된다. 지난해 4월 한국소비자원이 중고거래 플랫폼 4곳(중고나라·당근마켓·번개장터·헬로마켓)을 이용한 소비자 11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주요 중고거래 품목 중 3위가 ‘의류’(13.7%)였다.
20·30대를 중심으로 중고 의류를 찾는 수요가 늘면서, 현대백화점 판교점, 서울 여의도의 더현대서울과 같은 수도권 주요 점포에는 중고매장이 입점했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지난 2021년 전 세계 중고 명품 매출은 2017년 대비 65% 증가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중고 시장은 2020년 20조원 규모로 2008년 대비 5배 늘었다.
중고 거래가 늘면서 최근 의류 소비는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29일 발표한 통계청의 11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의복 등 준내구재의 소매 판매가 전월대비 5.9% 감소했다. 준내구재는 전년 동월 대비로도 10% 감소했는데, 따뜻해진 날씨로 인해 동절기 의복 구매가 줄어들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인플레이션(물가상승)과 금리 상승으로 전반적인 소비가 위축되면서 생필품이 아닌 의류 소비가 위축된 것으로 분석된다. 11월 소비 동향을 보여주는 소매판매액지수(계절조정)는 전월 대비 1.8% 감소해 3개월 연속 내리막이었다.
어운선 통계청 경제동향통계심의관은 “국내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고 있고 물가 상승, 금리 인상 등으로 소비심리가 꺾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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