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인생이라는 승부차기
“와 드디어 이겼다! 잠결에 아이의 환호성을 듣고 비몽사몽 벌떡 일어났다. ‘맞아, 새벽에 우리나라 조별리그가 열리지?’ 아이는 월드컵을 라이브로 꼭 봐야 한다며 초저녁부터 미리 잠을 청했던 터였다. 경기가 끝날 무렵에야 잠에서 깬 나는 뒤늦게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는데, 살면서 여태까지 축구공 한번 제대로 못 차봤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 또한 열렬한 축구 애호가가 되어 있었다.
어떤 분야든 누군가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 다 함께 같은 목표를 소망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흥분되는 일이 있을까? 그런데 지난 월드컵을 보면서 느낀 것이 생각보다 승부차기를 통해 경기의 승패가 가려지는 경우가 제법 많구나 하는 것이었다. 승부차기를 위해 골대 앞에 선 선수들의 표정이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필드를 자유자재로 누비던 선수들이 막상 골대 앞에 서니 아까 그 선수가 정말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선수의 얼굴에서는 긴장감과 부담감이 확연히 느껴졌고 그걸 지켜보는 나마저도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열한 명이 똘똘 뭉쳐 팀플레이를 하는 축구와 경기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이 승부차기는 마치 전혀 다른 스포츠 같아 보였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학창 시절 활동했던 테니스부에서 타 대학과 친선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신입생이었던 나는 그날 타 대학 신입생과 단식 시합을 치르게 되었다. 보통 신입생은 공을 하늘 높이 던지며 하는 서브에 미숙하기 마련인데, 내 상대 선수는 서브 자세가 제법이었다. 또 자세만 멋진 게 아니라 공의 속도까지 엄청나게 빨랐다. 상대의 공을 연달아 받아내지 못한 나는 점차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같은 신입인데 왜 이렇게 잘하는 거지? 지켜보는 동기, 선배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할까?’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데, 그때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공을 못 받아내면 다음에 엄청난 훈련이 기다리고 있으니 각오하란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터져나갈 거 같았다. 그때 주장이었던 다른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평상시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공만 잘 바라봐. 넌 할 수 있어, 딱 하나만 받아내자.”
세월이 많이 지났으나 그때의 기억이 나에게 아직도 생생한 이유는 주장 선배의 따뜻한 격려를 통해 나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시합에서 패하긴 했으나 누군가의 격려로 마음이 가라앉고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던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승부차기를 위해 골대 앞에 홀로 서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만 개의 눈동자와 마주해야 한다. 팀의 승패가 자기 발에 달려 있고, 게다가 찰 기회도 딱 한 번이다. 이 경우 실력이 우수한 선수일수록 부담이 더 크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늘 잘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승부차기 골을 넣어봐야 고작 ‘본전’인 셈이다. 수만 개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하고 ‘기대’를 저 버리지 않을까 하는 부담을 느끼더라도 그 부담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온전히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심지어는 아무도 부담을 주지 않는데도 스스로 그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상담실에서 만난 내담자들에게 늘 시작하는 말이 있다 “지난 일주일간 어떻게 지내셨어요?”라는 질문에 대답은 제각각이다. 그런데 평소 중압감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에 초점을 둔다. “지난주에 운동을 몇 번 하지 못했어요.” “지난주는 학교에서 조퇴한 날이 있었어요.” “공부를 해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었어요” 이런 생각은 사람의 마음을 괜히 주눅 들게 만든다.
운동을 매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중압감이 단지 한두 번 빠지는 것에도 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운동하나 제대로 못 해냈다고 자신을 자책하고 몰아붙이는 셈이다. 만약 학교에서 조퇴를 하루 했다면 그 나머지는 조퇴도 하지 않고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를 못한다. 내 마음은 늘 엄격한 감독을 둔 선수와도 같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바라보는 눈이 많아도 그 시선을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나에게 달렸다는 것을 꼭 명심하자. 부담을 완전히 내려놓고 평소 연습한 대로 최선을 다해야 인생이라는 승부차기에서 멋진 골을 넣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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