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 기대는 증오를 부른다

기자 2023. 1. 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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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 합리적 기대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가계, 기업 등 경제주체들이 가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이용해서 미래를 합리적으로 예측하고 의사결정에 반영한다는 것이다. 말은 정치하고 이론의 완결성은 높을 수 있겠으나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게 돌아가지는 않는 거 같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이었던 서브프라임모기지대출의 과잉을 놓고 말들이 많았었는데 그 똑똑하다는 미국 은행가들의 기대가 이상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들이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예측했다는 것이다. 부동산 가격만 불패면 불안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줘도 남는 장사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 결과는? 역대급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

사람들이 뭔가에 대해 기대를 하고, 그 기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기대의 대상이 경제이든 조직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문제는 기대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제법 많다. 첫 번째, 국내 채권시장은 민간회사채가 아닌 국채와 특수채(공공기관, 은행 등) 등이 지배를 하고 있다. 그중 한국전력공사채권 같은 특수채는 시장에서 독특한 기대를 받는다. 공공기관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기대가 행동에 반영되어 투자자들이 한전에 싸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시장에서 인기도 많다. 결국 한전은 싼값에 많은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금이 비효율적으로 쓰인다든가 탄소중립에 반하는 투자에 사용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두 번째, 얼마 전 대표적 진보매체인 한겨레 기자와 김만배 간의 돈거래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웠다. 돈 거래를 한 기자에 대한 비판은 차고 넘친다. 더구나 9억원이니 무슨 말을 하겠나. 연이어 사람들은 한겨레에 대해 상당한 분노를 표출했고 이 근저에는 진보매체에 대한 기대가 자리 잡고 있다. 진보지는 도덕적으로 깨끗할 것이라는 기대이다. 화가 많이 났는지 무려 30년 전인 1991년 한겨레의 보사부기자단 거액촌지 특종까지 소환하며 타락을 비판한다. 근데 필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궁금했다. 과연 우리는 누군가의 도덕성에 대해 합리적 기대를 하고 사는 것일까? 삶은 자기를 망치는 일의 연속인데 가능한 모든 정보로 판단을 한다면 도덕성에 대한 높은 기대는 형성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한 기대를 한다면 그런 마음은 주관적인 팬심일 가능성이 높다. 팬들은 본질가치보다 그 단체, 그 사람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특성이기 때문이다. 자, 팬들은 평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지만 이들이 돌아서면 더 무섭다. 과잉기대는 증오를 부르고 그 대상을 한방에 베어버리기 일쑤이다. 이런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인가?

마지막이다. 집권 초반에 윤석열 대통령은 제2의 MB인 듯 보였는데 요즈음은 아닌 거 같다. 트럼프에 더 가까워 보인다. 트럼프의 특성 중 하나는 모든 기대를 배반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보수공화당의 대통령이지만 주류보수와 여러모로 각을 세운 이단아였고, 트위터를 통해 온갖 외교안보 이슈에 좌충우돌하면서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아갔다. 그 와중에 일관되게 가져갔던 이미지는 강한 자(strong man)이다. 윤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자의 좌충우돌이 묘한 쾌감을 줄 수 있겠으나 그 외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피곤한 불확실성일 뿐이다. 이 불확실성이 커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살면서 눈치만 보게 된다. 가끔 조롱과 분노를 표출하면서. 이런 사회는 생산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는 기대를 받는 사람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책임은 당연하지만 각도를 좀 바꾸어 볼 필요도 있다. 기대를 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일까? 왜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막 엎어지다가 또 순식간에 화를 내며 돌변하는 것일까? 누군가에 대한 합리적 기대를 형성하는 훈련은 되어 있는 걸까? 가능한 많은 정보를 이용해야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으니 결국 상대방에 대해 관심이 크게 없는 사람들이 과잉기대를 할 수도 있겠다.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나한테 크게 관심이 없어서 팬이 되는 아이러니다.

사랑이 증오를 이긴다(love trumps hate).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선거에서 미국 민주당의 슬로건이자 트럼프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생존법이다. 강한 자가 만들어내는 불확실성에 휘둘리지 말고 각자가 관심 있는 영역을 하나 정도 잡는 게 좋겠다. 그게 환경문제일 수도 있고 소액주주권리강화일 수도 있고 뭐든 좋다. 좀 더 적극적이 되는 게 스스로의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조금만 뒤져보면 할 수 있는 건 분명히 있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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