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드뷔시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曲 만들 것”
“음악으로 사람 기운을 북돋운다든가, 용기를 준다든가 하는 걸 가장 싫어합니다. 그런 목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난 10일, 일본 영화음악의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71)가 보내온 이메일에는 단단한 어조가 서려 있었다. 그는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내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주고 싶다 생각한 적이 없다. 음악(예술)을 만든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신경 쓰는 게 아니다. 스스로에게 기분 좋은 소리, 음악을 만들 뿐”이라고 했다. 다만 여기에 “물론 다소 신경 쓰일 수밖엔 없지만(웃음)”이라는 문장을 덧붙였다. 사카모토는 서면 인터뷰지만 ‘웃음’이라고 적었다.
17일 사카모토의 생일에 맞춰 발매한 신보 ‘12′에 대해 나눈 서면 인터뷰. 그가 2021년부터 직장암과 싸우며 쓴 음반으로, 평소 절친한 것으로 알려진 이우환 화백이 앨범 표지를 그렸다. 수록곡은 전부 쓴 날짜로 제목을 붙였다. “내겐 음악 일기였기 때문”이라 했다. 다만 8번 트랙 ‘20220302′에만 ‘Sarabande’(사라반드·완만하고 장중한 바로크 시대 무곡)란 부제를 붙였다.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이 3박자 형식을 유독 좋아하고, 그 우아한 춤을 상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죠.”
사카모토는 2017년 발표한 전작(前作) ‘에이싱크(async)’ 때는 2014년부터 투병해 온 인두암 극복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재작년 다시 직장암 선고를 받았다. “처음 반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 다른 병원의 두 번째 소견을 들었고, 수술을 권유 받았다. 6번 수술 뒤 여전히 암이 남아 지난해부터 항암제를 투여 중”이라고 했다. “오전 7시나 8시쯤 일어나 오후 10시쯤 잠들고, 어떨 땐 게을러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고, 음악은 언제든지 듣고 싶을 때 듣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다만 “수술, 항암 둘 다 체력을 크게 앗아 가서 콘서트는 이제 힘들다. 몸 상태가 좋을 때 집에서 곡을 만들 순 있을 것”이라 했다.
이런 이유로 지난 연말 사카모토는 이번 신보를 선(先)공개하는 콘서트를 온라인 무관중 사전 녹화 형식으로 열었다. 2022년 가을, 일주일에 걸쳐 20곡을 녹화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녹화할 체력을 유지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끝나고는 결국 기력이 다 떨어졌다”고 했다. 이 녹화본은 향후 공개될 극장판 콘서트 영화에도 쓰인다.
사카모토는 특히 “내겐 음악이 곧 언어지 언어로 표현 가능한 감정을 음악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자신에겐 음악이 “있었던 일, 심정을 쓴 게 아닌 우연히 어느 날 그런 곡이 떠올라 적어둔” 일기란 뜻. 다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고 바로 쓴 (미발매) 곡만큼은 그때의 감정을 솔직히 나타냈다”고 했다. 이 곡은 베르톨루치의 장례식에서도 연주됐다.
사카모토는 베르톨루치 영화 ‘마지막 황제’(1987) ‘마지막 사랑’(1990) ‘리틀 부다’(1993) 음악작업을 함께 했다. 베루톨루치가 마지막 황제 작업 당시 “(원래 곡을 맡기려던 이탈리아 영화 음악거장) 엔니오 모리꼬네라면 했을 것”이라며 갑작스레 곡 수정을 요구했고, 사카모토가 30분 만에 곡을 고쳐낸 일화가 유명하다. 이 영화는 사카모토 품에 그래미 상과 아시아인 최초 아카데미 음악상을 안겼다.
지난해 국내에선 가수 유희열이 만든 ‘아주 사적인 밤’이 사카모토의 곡 ‘아쿠아(Aqua)’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유사성을 확인했지만 표절이라 할 수 없다”고 한 사카모토의 답변이 공개됐지만, 진위 여부 논란이 일었다. 사카모토는 “유씨의 사무실이 해당 소동 관련 대응에 관한 조언을 요청했고, 음악적으로 분석했을 때 ‘상당히 비슷하지만 표절이라 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회신했다. 그걸 다른 분이 저희 측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소셜미디어에 올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솔직히 그렇게까지 큰 소동이 될 줄 몰라 놀랐고, 한편으로는 한국의 많은 분이 ‘아쿠아’를 사랑해 주고 있단 생각에 매우 감동했다”고도 했다.
그는 또한 “나 자신도 태어나 지금까지 들어왔던 모든 음악에 영향을 받고 있다. 좋아해서 여러번 들은 곡은 더더욱 그렇다”면서도, “(그 편린이 작곡에)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거라도 허용 여부는 작가의 윤리관에 달려 있다. 거기는 어느 정도 폭이 있을 것 같다. 나라면 너무 비슷하다 느끼면 조금 바꿔서 똑같이 되는 걸 피할 것 같다. 다만 비슷하단 걸 깨닫지 못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했다. “항상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써본 적 없는 소리(음색·멜로디·화음 등)를 내고 싶다 생각했죠. 곡을 만들면 만들수록 어렵게 느껴집니다만, 자신의 과거를 모방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사카모토는 지난해 6월부터 일본 문예지 ‘신초’에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보게 될까’란 에세이를 연재했다. 이달 초 최종회에는 지난해 9월 말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를 만난 사실을 적었고, “교만함 없는 호청년”이라 표현해 화제가 됐다. 그는 이 에세이가 “저의 거짓되지 않은 생각, 사실들”이라며 “제목은 영화 ‘마지막 사랑’ 막바지 동명 원작 작가 폴 볼스가 직접 말한 한 구절을 ‘살아가는 시간’을 상징하는 표현이라 생각해 채택했다”고 말했다. 그가 쓴 한 연재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 암을 발견한 2014년 62세에 죽었다고 해도 49세에 세상을 떠난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에 비하면 충분히 오래 산 것이다. 산 동안 경애하는 바흐나 드뷔시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
인터뷰 말미 사카모토는 ‘어떤 음악가’로 남고 싶냐는 물음에 다음처럼 답했다. “불손하게도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다 생각했지만 첫 앨범을 냈을 땐 음악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남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다란 마음은 없어요. 그런 음악가가 있었구나 할 정도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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