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화이부동] ‘공영방송 전쟁’의 종전선언을 위하여
지난해 4월27일 더불어민주당이 KBS·방송문화진흥회(MBC)·EBS 이사회와 사장 선출 방식을 운영위원회 중심으로 바꾸는 방송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발의했다. 11월에 수정된 개정안에 따르면, 핵심 내용은 이사 21명 추천권을 국회가 5명, 시청자위원회가 4명, 방송·미디어 관련 학회가 6명, 직능단체가 6명(방송기자연합회, 한국PD연합회,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각 2인) 갖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마디로 말해서 “민주당스럽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내로남불’의 압권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민주당은 이 개정안을 들이밀기 전에 문재인 정권 출범 전 당론으로 채택한 ‘공영방송 장악 금지법’을 무산시킨 것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 한다. ‘공영방송 장악 금지법’은 여당이 이사회를 독식하거나 야당이 반대하는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지 못하게 하자는 취지로 모처럼 여야 합의가 이루어진,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개혁조치였다.
이걸 없던 일로 날려버린 장본인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그는 2017년 8월22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진행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법안이 통과되면 온건한 인사가 선임되겠지만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뽑는 것이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생뚱맞은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법 개정을 무산시키고 말았다.
아, 문재인! 정말 놀라운 인물이다. 민주당 대선 주자 시절인 2016년 12월 문재인은 방송민주화를 위해 고초를 겪다가 암투병 중이던 MBC 기자 이용마를 찾아가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법적장치를 확실히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곧 공영방송의 독립이 이루어질 걸로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재인의 변심은 방송장악을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분명하다. 문재인은 이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예전 그대로의 ‘공영방송 장악’ 모델을 자신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지속시켰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문재인의 그런 변심에 맞장구를 친 민주당은 정권이 교체당하자 화들짝 놀라 윤석열 정권 출범 10여일 전에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고안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들고나왔으니, 선의를 인정받으려면 우선 사과부터 해야 한다는 요구가 결코 무리는 아닐 게다.
민주당 ‘개정안’에 앞서 사과해야
평소 지론이지만,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여야 합의는 오직 대선 1년 전의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어떤 정권이건 사실상 그간 여당 프리미엄으로 주어져온 공영방송 장악을 스스로 포기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대선 1년 전에 여야 타협이 가능한 이유는 여당 입장에선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대비, 야당 입장에선 대선 기간 중 방송 보도에 있어서 여당 프리미엄을 없애거나 최소화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시점은 2006년부터였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문제로 고통을 받는 방송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나와 같은 일부 언론학자들도 대선에서 이기기만 하면 180도로 표변하는 여야 정당들의 내로남불이 지겹다 못해 역겨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2007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2006년 10월4일 한국일보에 공영방송사의 사장 선출 방안에 관한 칼럼을 기고했다. 당시 나의 문제의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 그 일부 내용을 여기에 다시 소개한다.
“1987년 6월항쟁을 전후로 방송의 공정성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20년간 계속돼왔다. 처음 10년간 공영방송 노조는 일일이 세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파업을 했다. 많은 노조원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개혁·진보 세력은 방송노조의 투쟁에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다음 10년은 모든 게 뒤집어졌다. 그간 공정성을 생명처럼 여기던 지식인들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공정성 문제에 대해 입을 닫았다. 자기들이 원하는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제 공정성은 보수파의 신앙이 되었다.”
이어 “만약 내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어떻게 될까? 공정성 문제에 입 닫고 살던 사람들은 계속 입을 닫을까? 공정성을 외치던 보수파는 계속 공정성을 외칠까? 공정성이란 무엇인가? 그건 당파성인가? 내 맘에 들면 모른 척하고 내 맘에 안 들면 문제 삼아야 하는 그런 것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공정성을 둘러싼 이 얄팍한 정략 게임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부터 반성하겠다. 정치권도 여야를 막론하고 모두 역지사지하는 자세로 이 문제에 정직하게 대응하면 좋겠다. 방송을 권력으로부터 완전 독립시키는 대원칙에 합의하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이 공정성 갈등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은 지금이 딱 좋은 시기다. 한 세대에 한번 올까 말까 한 절호의 기회다. 여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으면 여당이 목숨 걸고 반대하겠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다. 야당은 집권 가능성이 높다 해도 내심 불안에 떨고 있는 만큼 내년 대선에서 방송 공정성을 확실하게 이뤄낼 수 있는 방안을 결사 반대할 처지는 아니다.”
나는 이후에도 이와 같은 칼럼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썼지만, 이젠 거의 포기한 상태다. 역지사지를 거부하는 건 정치인과 정당뿐만 아니라 지식인과 일반 시민들도 똑같았다. 이런 똑같은 싸움을 반복하면서 국력을 탕진하는 걸 우리의 숙명으로 본 체념의 지혜를 터득한 지 오래다. 아니 어쩌면 지난 30년 넘게 이루어진 이런 ‘공영방송 전쟁’은 치열한 당파싸움을 해야만 눈을 반짝거리며 신명을 내는 ‘다이내믹 코리안’을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인지도 모르겠다.
여야 모두 동의할 방법 찾아야
그래, 원한다면 우리 모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보자. 그런데 민주당이 이번에 방송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언론노조, 방송계, 일부 관련 학계 등의 지지를 받아 그걸 거부하는 국민의힘을 무슨 반동세력이나 되는 것처럼 합동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힌다. 국민의힘이 아무리 나쁘고 어리석고 우둔하다고 해도 민주당이 개혁을 빙자해 저지르는 적반하장을 차마 눈뜨고 보기는 어려웠다.
현재 주요 쟁점 중 하나는 3개 직능단체의 중립성 문제다. 방송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언론노조의 정치 성향도 이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 직능단체와 더불어 언론노조가 ‘친민주당’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언론노조와 언론노조에 가입한 다수 방송인들의 기본 인식은 “국민의힘은 한마디로 방송장악에 있어서는 전과 집단”이며, “군사독재 시절부터 수많은 언론인을 감방에 보내고 온갖 탄압을 일삼았던 DNA를 가진 게 국민의힘”이라고 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간 언론노조는 이런 비판을 많이 해왔지만, 흥미로운 건 언론노조가 문재인 정권하의 공영방송 평가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민주화의 역사를 소환하는 건 입법과 관련해 여야 정당을 대하는 중립적 자세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로 인해 형성된 방송인들의 ‘아비투스(습속)’가 어떤 정당에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어쩔 것인가? 문 정권 출범 때 방송사 경영진을 바꿀 수 있는 KBS 이사회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 교체를 위해 온갖 무리수를 저지르면서 앞장선 건 언론노조와 시민단체였다. 윤 정권은 이들을 동원할 수 없거나 그럴 수 있는 역량이 없다. 이런 차이를 모를 리 없는 민주당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개정안을 들고나와 권력의 방송장악에 결사 반대하는 공정성의 화신처럼 구는 건 보기에 민망하다.
언론노조, 방송 유관단체, 관련 학계는 양쪽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지, 한쪽은 적극 찬성하고 다른 한쪽은 적극 반대하는 개정안을 다수결과 여론몰이로 밀어붙여보겠다는 민주당의 행태에 지지를 보내는 건 옳지 않다. 이전의 ‘공영방송 장악 금지법’에 대한 민주당의 배신에 분노하긴 했었는가?
‘공영방송 전쟁’의 종전선언은 주요 갈등 당사자들의 합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잊지 않으면 좋겠다. MBC 기자의 ‘전용기 탑승 불허’ 등과 같은 윤 정권의 어리석은 일련의 행태엔 침을 뱉더라도 입법에 대해선 좀 더 냉정해지자. 국민의힘에 대한 압박이 좀 더 정의롭고 합리적인 것이 되기를 기대한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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