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카이사르 vs. 그레고리우스 ‘달력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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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현지 시각 지난 1월 6일 정오부터 7일 밤 12시까지 ‘36시간 휴전’을 명령했습니다. 왜 휴전 기간이 ‘1월 6~7일’이었을까요. 러시아 정교회 달력으론 1월 7일이 성탄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가 “정교회 신자들이 성탄 전날과 당일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키릴 총대주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호해 세계적 지탄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가 이를 테면 ‘성탄 휴전’을 제안한 셈이었습니다.(실제로는 휴전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이미 아는 분이 많으시겠지만 성탄절 날짜가 이렇게 다른 것은 러시아 정교회가 율리우스력(曆)을 쓰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쓰는 표준 달력은 ‘그레고리우스력(曆)’입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탄절은 율리우스력으로는 12월 25일이지만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13일 늦은 1월 7일이었습니다. 새해 첫날인 1월 1일도 13일 차이가 나고요. 그러니 푸틴이 제안한 ‘성탄절 휴전’은 그레고리우스력을 쓰는 나라 사람들이 보기엔 이미 새해가 되고도 1주일이 지난 시점이 되는 것이지요. 당시엔 이런 뉴스도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 역시 그동안 1월 7일을 성탄절로 기려왔지만 지난해 11월부터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옮겨 치르는 것을 허용했다”는 뉴스였지요.
그레고리우스력과 율리우스력은 일견 단순한 두 개의 달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학(천문학)과 종교, 정치 그리고 ‘표준(스탠다드) 경쟁’이 얽힌 복잡한 스토리입니다. 알려진 대로 율리우스력은 기원전 45년 카이사르가 만든 달력입니다. 태양력이지요. 그런데 태양력도 1년이 숫자로 똑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윤년이 있지요. 1년을 365.25일로 계산한 율리우스력은 128년에 하루씩 늦어지는 오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부활절을 계산하는 방법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공의회)에서 정해졌는데요, 기준은 ‘춘분 후 첫 만월(滿月) 후 첫 일요일’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매년 부활절 날짜가 바뀝니다.(올해 부활절은 4월 9일입니다. 정교회는 4월 16일입니다.) 당시에는 3월 21일을 춘분으로 계산했는데 1200년이 흐르는 사이 실제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과 율리우스력 3월 21일 사이에 ‘10일의 오차’가 발생했답니다.
이 오차를 교정한 것이 그레고리우스력입니다. 1582년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오차 10일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그레고리우스력을 발표한 것이지요. 그렇게 그레고리우스력 제정 당시엔 10일이었던 오차가 400여년이 흐르면서 이제는 13일로 늘어나 율리우스력 12월 25일 성탄절은 그레고리우스력 1월 7일이 된 것이지요.
이렇게 ‘과학적’인 새 달력이 나왔으면 금방 역법이 통일 될 것 같지만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답니다. 당시는 유럽에서 종교개혁의 바람이 거셀 때이지요. 새 달력을 반포한 주인공은 가톨릭 교황이었습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가톨릭 국가들은 빨리 그레고리우스력으로 갈아탔지만 개신교와 정교회 교세가 강한 나라들은 새 달력을 무시하고 기존 율리우스력을 그대로 사용했답니다. 개신교세가 강한 독일, 덴마크, 잉글랜드, 미국은 17~18세기 들어서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바꿨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선말 고종 때인 1896년 그레고리우스력을 채택했습니다. 러시아는 1918년 공산혁명 이후에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바꿨답니다. 구소련에서는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바꾸자 웃지 못할 혼란이 있었다네요. ‘2월 혁명’은 율리우스력 2월 23일에 일어났는데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3월 8일이고, 율리우스력 10월 25일에 일어난 ‘10월 혁명’은 그레고리우스력 ‘11월 7일’이 되었답니다. 3월에 ‘2월 혁명’, 11월에 ‘10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 되지요. 이런 혼란뿐 아니라 러시아정교회가 반발했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그레고리우스력을 쓰지만 정교회 신앙과 관련이 있는 성탄절 등은 율리우스력을 기준으로 기리고 있답니다. 그러나 정교회라고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슬라브민족 계통의 정교회는 율리우스력을 썼지만 그리스 등 많은 지역의 정교회는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한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처음 정교회가 들어온 것은 구한말 제정러시아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분단을 거치며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가 6·25전쟁 때 참전한 그리스를 통해 정교회가 다시 들어왔지요. 그래서 한국정교회도 그레고리우스력을 쓰고 있습니다. 한국정교회의 경우 매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세계총대교구청에서 보내주는 두툼한 ‘달력 책’을 기준으로 축일과 예배 때 부르는 성가 등을 정한답니다.
우리는 100여년 동안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면서 익숙해졌지만 세계 각국에는 지금도 다양한 달력이 존재합니다. 2007년 에티오피아 출장 때 현지에서는 이미 7년이나 지난 밀레니엄 준비로 들떠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긴 적이 있습니다. 알고보니 에티오피아는 자신들만의 달력을 쓰고 있답니다. 그레고리우스력보다 평균 7년 8개월 늦고, 1년의 시작이 9월이랍니다.
달력에 이념이 개입하기도 하지요. 과거 프랑스대혁명 후 혁명정부는 1793년부터 1805년까지 12년 동안이나 혁명력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종교를 부정하고 인간 이성을 앞세운 혁명정부는 사회의 모든 분야를 뒤집었는데 그 가운데 달력도 포함됐던 것입니다. 1년의 시작을 9월 22일부터 계산하면서 ‘포도의 달’ ‘안개의 달’ ‘서리의 달’ 식으로 이름을 붙였지요. 한 달은 30일, 1주일은 10일로 계산했다지요.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은 후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돌아갔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달력까지는 아니지만 시간을 바꾼 적이 있지요. 북한은 대한민국과 같이 동경 135도에 맞춘 시간을 써왔는데 돌연 2015년 8월 15일부터 동경 127.5도에 맞춰 ‘평양시간’이라며 서울 시간보다 30분 늦은 시간을 표준시로 발표했다가 불과 3년도 안 된 2018년 5월 5일 원래대로 서울과 같은 시간으로 돌려놓기도 했습니다. 엉뚱하게 ‘시간’을 놓고 남한과 ‘표준 경쟁’을 벌이다 포기한 셈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바꾼다는 뉴스에 관해서는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한국정교회 임종훈 안토니오스 신부는 “저도 그 뉴스를 보고 알아보니 우크라이나 정교회 전체가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바꾼다기 보다는 자율적으로 성탄절을 기념하도록 허용했다고 한다”며 “전통적인 성탄절을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바꿔 기념할 수 있다고 허용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간 써오던 달력을 교체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자체가 이번 전쟁 때문에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국민들의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보여주는 방증이겠지요.
달력 하나에도 역사와 종교, 정치가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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