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197] “법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형사가 이메일을 읽었다. “1월 15일, 극비 통보. 품질보증부 내부와 연구소에 등록된 모든 컴퓨터는 필요한 데이터만 백업을 하고 일단 초기화할 것. 각 섹션의 관리 책임자가 열람한 뒤 필요한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를 다시 설치할 것. 종이로 된 자료는 모두 폐기할 것. 가노 씨, 당신이 구조적 결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은폐를 지시한 증거가 갖춰졌어요. 인제 와서 발뺌해봤자 더 비참해질 뿐입니다.” - 이케이도 준 ‘하늘을 나는 타이어’ 중에서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와 관련, 감사원에 제출해야 할 자료를 없앤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파기를 지시했을 국장과 명령에 따랐을 과장, ‘신내림’을 받은 것 같다던 서기관의 형량 차이는 4개월. 그들 모두 집행유예지만 유죄판결이 억울하다며 항소했다. 형량이 약하다며 검찰도 판결에 불복, 항소했다.
불리한 자료를 남겨 벌을 받느니 증거를 인멸하고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것이 계산상 이득이라는 걸 법이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진실을 감추라 지시하고 그 책임을 져야 할 상사와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부하 직원의 형량마저 비슷하다면 왜 직책 높은 사람의 연봉이 더 많을까. 그들 또한 더 높은 데서 지시받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일까.
소설 속 상무는 트럭의 구조적 결함 때문에 벌어진 인사 사고의 책임과 리콜 사태를 피하려고 증거를 조작하고 자료를 삭제하라고 지시한다. 앞에 나서진 않지만 사장의 묵인 아래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사건 은폐가 회사를 위한 게 아니라고 믿은 직원은 파기하지 않은 자료를 경찰에 넘긴다. 세상을 속일 수 있다고 자신하던 상무는 증거 앞에 무너진다. 그때 담당 수사관이 기개 있게 소리친다. “경찰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북한에 피살된 해양수산부 이대준씨 사건 당시 국방부 장관과 국정원장의 지시로 5500건이 넘는 자료가 파기됐다. 하지만 책임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법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외치듯 항소한 검찰처럼, 국가 자료의 중요성을 천명하는 법원의 포효를 들을 수 있을까.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만물상] “남녀 공학 안 할래요”
- 트럼프 압박 시작됐다, 대만 국방비 110조 될 수도
- 트럼프, 주이스라엘 대사 허커비 지명... 네타냐후가 웃는다
- ‘골목 벽화’ 논란 창신동, 6400가구로 재개발 다시 추진
- 트럼프 “머스크의 개혁, 정부 관료주의 해체·재구성”
- 한국 증시, 나흘째 ‘트럼프發 패닉셀’... 코앞에 둔 ‘4만전자’
- 엄마 뱃속에서 ‘이것’ 노출된 아이, 어른 돼서도 뇌 손상 겪는다
- 전공의협회가 지지한 박형욱, 의협 새 비대위원장 당선
- 이기흥 체육회장 “3선 도전 결정 유보... 비위 혐의 동의 못해”
- 신곡 낸 이문세 “박수 쳐주는 관객 한 명만 있어도... 은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