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 가는 포장도로를 '전두환 도로'라고 하는 까닭
[박승옥 햇빛학교 이사장]
마곡사 가는 포장도로를 '전두환 도로'라고 하는 까닭
충남 공주의 마곡사에는 '군왕대'라는 작은 봉우리가 하나 있습니다. 임금이 나올만한 명당이라고 하여 '임금의 터'라는 뜻의 군왕대(君王垈)라고 이름 지었다 합니다. 마곡사에서 세워놓은 표지판을 보면 세조가 이곳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지만 여기의 기운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탄복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사람들은 군왕대에 와서 억지로라도 군왕의 기운을 느껴보려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바로 군왕의 기운을 느꼈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기운을 느꼈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도 신기가 있는 사람이거나 사기꾼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라고 짐작만 할 따름입니다.
믿거나말거나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가 있는 해에는 수많은 후보들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군왕대와 군왕대 바로 밑에 있는 영산전에 와서 기도를 드리고 간다고 합니다. 문재인 후보, 윤석열 후보도 왔다 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곡면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마곡사로 가는 길을 마곡사 인근 주민들은 '전두환 도로'라고 부릅니다. 12.12 쿠데타로 국보위원장이 된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기 직전 1980년 초 이순자와 함께 기도하러 군왕대와 영산전에 왔다고 합니다. 당시 마곡사는 십승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멀고 먼 골짜기 깊숙이 위치해 있는 아주 외진 절이었습니다. 길도 비포장이었고 마곡천도 몇 번이나 건너야 하는 험한 여정이었습니다. 울퉁불퉁 쿵쾅쿵쾅 엉덩이가 어지간히 아팠던 모양입니다.
서울로 돌아간 전두환은 즉시 마곡사 길을 새로 내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마곡천을 건너야 하는 옛 도로 대신 산을 깍아 새로 낸 포장도로가 바로 지금의 629번 지방도로라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전두환은 독재자 군왕이 되었습니다.
'군왕대'를 왜 왕이 나올 자리라고 했을까
마곡사 바로 밑에서 살고 있는 저는 매일 새벽 산책을 하면서 군왕대를 오릅니다. 그리고는 두 발로 군왕대 바닥을 힘주어 밟으면서 대한민국에서 다시는 박정희와 전두환같은 독재자 군왕 대통령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런데 요즘은 영 제 기도발이 시원찮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군왕대를 임금보다 더 강한 지기가 있다고 사람들이 느낀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근대 이전 우리의 조상들은 산의 맥과 물의 흐름 자체를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인식했습니다. 거의 모든 인민들이 풍수사상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입니다. 사실 가이아 이론의 원조는 풍수사상입니다.
군왕대 능선을 타고 위로 올라가면 나발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군왕이 말을 타고 진군 나팔과 함께 우렁차게 돌격 앞으로 진격 명령을 내립니다. 오른쪽으로는 생골천을 건너 우군이 진격합니다. 왼쪽으로는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좌군이 진격합니다. 그렇게 날랜 범의 기세로 중군을 이끌고 마구 말을 짓쳐 달려 내려갑니다.
생골천과 마곡천은 군왕대 바로 밑 영산전 앞자락에서 합쳐집니다. 두물머리입니다. 엄청난 기세로 달려 내려오던 말이 히히힝 하면서 갑자기 앞발을 들고 멈춰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면 물에 빠져 죽습니다. 요새 용어로는 끼이익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멈춤의 기세가 얼마나 세겠습니까.
군왕대의 기운은 다름아닌 한 순간 멈춤의 기세인 것입니다. 권력은 멈추어야만 힘이 생깁니다. 다양한 국민들의 그 수많은 갈등과 다툼을 조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힘은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고 멈춤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멈춤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용기이자 기운의 축적입니다
천주교 수도원에는 스타치오(statio)라고 부르는 장소가 있습니다. 멈춘다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정거장, 역(station)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하는 곳입니다.
붓다는 삶의 진리를 깨닫기 위한 핵심 수행 방식 가운데 하나로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sana)을 설파했습니다. 말 그대로 멈추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탐욕과 분노와 무지의 말타기를 멈추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얘기입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면 탐욕의 늪에 빠져 죽는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불가에서 멈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중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멈춤은 알아차림이자 성찰이고 지혜의 축적이자 생사를 건 용맹정진의 시작입니다. 멈춤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깨달음으로 가는 바른 길의 문입니다. 새로운 기운을 축적하는 행위이자 새로운 서원(誓願, panidhi)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라는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기운이 없으면 파국을 극복하는 비상구나 탈출구 또한 찾아질 수 없을 것입니다.
주권자가 멈춰야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멈춥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보가 연일 미디어를 뜨겁게 달굽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두 진영으로 확연히 나뉘어 매일매일 피가 튀기는 것만 같은 살벌한 언어로 설전을 벌입니다. 말로만 보면 마치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것만 같습니다.
저는 최근에 지인 한 분이 극우 태극기 부대의 유튜브 채널을 꼭 한 번 보라고 권해서 몇몇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광훈이란 목사가 나와서 대한민국은 이미 공산화 되어 있다고 서슴없이 단언하고 있었습니다. 힌국을 공산주의 사회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극우 유튜버들이 이런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트럼프식의 증오정치와 일루미나티 등의 음모론도 여과없이 그대로 사실처럼 얘기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문재인도 일루미나티고 김정은과 시진핑까지 모두 다 일루미나티 회원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준석도 일루미나티 회원이었습니다. 정말 놀랄 노자 뒤죽박죽 괴이한 주장과 견해였습니다.
윤 대통령이 고삐풀린 무엇처럼 권력의 칼춤을 추고 있는 것은 이런 극우 유튜브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라는 그 지인 분의 주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작년에 넨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윤대통령이 그를 만나지 않은 것도 펠로시를 이른바 큐어넌 음모론의 악마로 인식해서라는 소문도 사실처럼 들렸습니다.
윤 대통령이 당분간 권력의 칼을 멈출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매번 5년마다 되풀이되는 이런 지겨운 권력의 칼춤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윤석열 퇴진 집회는 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집권 4개월만에 퇴진집회를 할까 하고 그 분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정치행위는 오히려 역반응을 불러올 뿐이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개딸 부대의 팬덤 정치는 국민들을 분열의 깊은 수렁으로 더욱 깊게 빠지게 할 따름입니다. 적대적 공존의 양극화된 국민 동원 정치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엘리트 대의정 체제가 히틀러를 불러들였듯 또다시 박정희와 전두환을 불러들이는 대단히 위험한 반동의 정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퇴진시켜야 하는 것은 대통령 한사람이 아니라 군왕 대통령 제도 자체입니다. 엘리트 대의정 체제 자체입니다. 애초에 군왕 대통령이 나올 수 없도록 조선시대 왕보다도 훨씬 더 많은 권한을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헌정 체제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정권을 잡으면 하는 일이란 게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전 정부 정책을 모조리 뒤집고 날이면 날마다 전정부 사람 잡아다 수사하고 기소하고 재판하고 잡아 가두고 심지어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가고... 언제까지 이런 소모성 권력 칼춤, 반동의 스프링 정치를 계속해야 합니까.
대한민국의 권력자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주권자 국민, 인민입니다. 우리 헌법이 명백하게 그렇게 규정해놓고 있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인민만이 탐욕의 권력 정치를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인민이 자신의 권력을 대행해준다고 착각하는 대의정 엘리트 팬덤정치를 끝내고 대화와 소통의 민주주의 정치를 실천해야만 이런 군왕 대통령의 권력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의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은 국민 가운데 일부가 그렇게 하라고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강하게 발언해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다수가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설문에 찬성했기 때문입니다. 핵무장이라니, 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박정희의 말로가 떠올랐습니다. 미국이 어떻게 대응할지 알고나 한 소리인지 화들짝 놀랐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한반도가 핵전쟁의 3차 세계대전 방아쇠 지역으로 초토화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으로 소름이 돋았습니다.
기후체제 전환의 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최근에 여기저기서 선거제도 개편에서부터 이원집정부제니 내각제니 또다시 권력구조 개편의 개헌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거제도 개편과 개헌은 지난 수십년 동안 그 권한이 있는 기득권 엘리트 국회의원들에 의해 번번이 무산되거나 왜곡되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선거제도 개편과 개헌의 가장 핵심 사항은 국민발의제라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권력자인 주권자가 적대적 공존의 정치를 끝내고 기후체제로의 전환을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길 가운데 하나가 지금으로서는 국민발의제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그것도 국회를 거치지 않는 온전한 국민발의제 말입니다. 국민이 국민발의로 온전히 권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그나마 기후체제 전환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복지 등 수많은 주요 국가 정책 결정을 왜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의 대통령이나 300명의 국회의원들에게 맡겨야 합니까. 이들 기득권자들은 기득권자들을 위한 정책을 결정할 뿐입니다. 절대 다수의 흙수저와 무수저 인민들이 인민들을 위한 정책을 훨씬 더 잘 결정할 수 있습니다. 주권자 자신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로서 직접 나라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훨씬 더 미래를 생각하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그야말로 탐욕의 질주를 멈추고 국민들과 함께 기후체제 전환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도 있을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 주장한 이른바 철학자 정치가 그렇습니다. 네팔의 입헌군주정을 그 중 한 사례로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길은 개발과 성장 지상주의의 자본주의 산업사회와 엘리트 대의정 체제에서는 거의 꿈에 가까운 공허한 기대일 뿐입니다. 1992년 리우 기후정상회의 이후 30년 이상의 국제정치와 각국의 대의정 엘리트 국내정치가 이를 웅변으로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선거제도 개편도 국민발의제 개헌을 찬성하는 국회의원을 뽑는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권력구조 개편 개헌도 그 안에 온전한 국민발의제 개헌이 포함된다면 '거대한 일보전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군왕대에 갔다와서 두서없는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 이 글은 웹진 <나비>의 '기후@나비'에 동시 게재됩니다.(☞ 바로 가기)
[박승옥 햇빛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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