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가벼운 입’, 또…외교 리스크
“한·이란 관계 무관” 진화 불구
이란 “한국 설명 예의주시 중”
“안보·경제 얽힌 3국 악영향”
자칫 외교 문제로 비화 우려
윤석열 대통령의 ‘가벼운 입’이 또 논란을 낳고 있다. 이번에는 국내 문제가 아닌 국제적 이슈, 그중에서도 중동 국가들과 미국 등 서방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민감한 문제에 대한 발언이어서 상당한 외교적 파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윤 대통령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방문 중이던 지난 15일 UAE에 파병된 아크부대를 찾아 “우리의 형제 국가인 UAE의 안보는 바로 우리의 안보”라며 “UAE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기 때문에 우리와 UAE는 매우 유사한 입장”이라고 했다. 이 발언은 UAE와 이란을 적으로 단정했다는 점에서 문제다. 또 UAE가 한국과 형제 국가라고 설명해 한국과 이란은 적이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다. UAE가 이란과 껄끄러운 관계인 것은 맞지만, 중동 정세가 단순 논리로 정리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UAE와 이란은 각각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국가로 종교적 배경이 다르다. 2016년 수니파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아파 성직자 니므르알 니므르를 처형한 후 이란의 사우디대사관이 공격당하자 UAE는 이란과 단교한 사우디에 발맞추기 위해 이란과의 외교 수준을 대사급에서 공사급으로 낮췄다. 또 페르시아만 아부 무사 섬 등을 놓고 영토 분쟁을 겪고 있다. UAE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란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윤 대통령 발언은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UAE가 이란과 오랜 갈등을 겪었다는 점, 미국과 이란이 적대적 관계이고 미국이 UAE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미국과 UAE가 이란에 대해 같은 입장일 것이라고 판단했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중동 정세를 보면 UAE와 이란, 미국의 관계가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엮여 있음을 알 수 있다.
UAE와 이란은 경제·안보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사이다. 두 나라 교역량도 상당하다. 관계가 좋지 않을 때도 두바이를 통한 밀무역이 성행했다. 이란은 수입 68%를 UAE에 의존하고 있다. 해외 지정학 리스크 분석매체인 포린브리프에 따르면, UAE의 이란 수출액은 지난해 120억달러(약 14조8800억원)를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두 나라는 2021년 UAE가 이란에 특사를 파견한 것을 계기로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고 지난해 8월 UAE가 다시 테헤란에 대사를 파견해 관계를 복원했다.
야당 ‘외교 참사’ 난타…“윤 대통령, 편향된 국제 인식 문제”
제3국 이란 ‘예민한 관계’ 건드리며 불필요한 오해 자초
껄끄럽던 UAE·이란 ‘경제 밀착’…작년 외교관계 복원
야 “이란이 우리 적인가” 여 “사실 말한 것” 외통위 공방
미국과 UAE의 관계도 조 바이든 정부 들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정부 때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미국산 무기를 수입했던 UAE는 바이든 정부가 이란 핵합의(JCPOA)를 복원하려는 시도에 반발해 중국에 손을 내밀었다.
대통령실은 “UAE가 당면한 엄중한 안보 현실을 직시하면서 열심히 근무하라는 취지에서 하신 발언”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 발언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이란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는 데다 UAE까지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대형 사고’다.
실제 이란은 16일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나세르 칸아니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면서 “외교적으로 부적절한 한국 대통령 발언을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으며 한국 외교부의 설명을 기다린다”며 공개 해명을 요구했다. 외교부는 17일 “장병 격려 차원 말씀”이라며 “국가 간의 관계와는 무관한바, 불필요하게 확대해석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재차 해명했다.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은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외교 채널을 통해 이란과 소통했다며 “(이란이) 우리 설명을 이해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 해명에 대해 국내에서도 강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한 외교소식통은 “대통령이 하지 말아야 할 발언을 해놓고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말라는 것은 상대 입장에서 보면 적반하장”이라며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먼저”라고 지적했다.
다른 소식통은 윤 대통령의 핵보유 발언과 일본 방위비 증액 관련 발언 등을 지적하면서 “외교·대외전략 사안에 대통령이 문제 발언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고 우려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실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잘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위험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외교안보 참모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윤 대통령의 잘못이 더 크다는 지적도 많다. 외교 의전에 밝은 한 소식통은 “대통령 발언에 세세하게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본인이 정확히 이해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발언은 대통령의 국제관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외교 상대국마저 ‘아군과 적군’으로 편을 갈라 구별하려는 편향적 인식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해석이다.
외교관 출신의 한 전직 관료는 “대외관계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은 전 세계가 오디언스이기 때문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며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대통령의 공개 발언 기회를 줄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외통위 전체회의에서 야당은 “외교 참사”라고 질타한 반면 여당은 “사실인 얘기”라며 윤 대통령을 옹호했다.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번 순방에서도 윤 대통령께서 어김없이 사고를 치셨다”며 “이란이 한국의 적인 것처럼 오해가 생겨버렸다”고 말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은 “UAE 국민들은 이란을 최대 위협국가로 보고 적대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 윤 대통령 발언이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이윤정 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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