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는 끝내는 술이 아닌 이어주는 술…주막 세계화가 인생 2막”[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손제민 기자 2023. 1. 1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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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원 과천 별주막 대표
서형원 별주막 대표가 지난 3일 경기 과천시 별주막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그의 앞에 그가 만든 술들이 놓였고, 뒤에는 별주막에서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우리 술들이 진열돼 있다. 한수빈 기자 subinhann@kyunghyang.com
서울에서 나고 자라 과천 사람이 됐다. 젊은 시절 환경운동을 하다 30대 후반이던 2006년 무소속 과천시의원이 됐고, 2010년 재선에 성공했다. 전반기 시의회 의장을 맡았다. 2012년 녹색당 창당을 주도했고, 2년 남짓 녹색당 시의원으로 일했다. 2014년 녹색당으로 과천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 뒤로 과천에 별주막이라는 막걸리집과 과천도가라는 양조장을 열어 우리술 알리기에 전념하고 있다. <멀고 낯설고 긴, 여행이 필요해>(2016), <행복하려면, 녹색>(2014) 등의 책을 썼다.
막걸리엔 장벽 낮추고 경계를 넘게 하는 힘이 있어
우리 술과 먹거리를 어울림의 그릇에 담아내고 이야기 첨가

늘 궁금했다. 환경운동가 출신으로 녹색당 시의원을 지낸 그는 어떤 이유로 막걸리 장사를 하게 됐을까. 지난 3일 경기 과천 별양동 상가 지하에 있는 별주막을 찾았을 때 서형원 대표(54)는 직원들과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서 대표는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하면 치킨집을 차리지 않나. 저는 그게 막걸리집이었을 뿐”이라며 웃었다. 시원시원한 답변, 미소 띤 온화한 얼굴에서 벌써 이 집 막걸리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막걸리는 끝내는 술이 아니라 이어주는 술”이라는 그의 철학처럼 막걸리 덕에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치열했던 환경운동가, 풀뿌리 정치인으로서 삶이 1막이었다면 2막은 그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술 만들어 사람들 대접하고 내친걸음에 주막 세계화를 향해 가는 길이다. 풍미 깊은 우리 술 애호층이 늘고 있는 지금이 적기라고 그는 자신했다.

- 별주막을 소개해주시죠.

“2016년 1월에 열었으니 꼭 7년 됐네요. 우리 술과 먹을거리를 주막이라는 문화적 그릇에 담아 즐기는 곳입니다. 우리 술이라면 옛 전통을 잇는 술을 포함해 이 땅에서 난 쌀과 재료로 만든 술을 의미하고요.”

- 왜 ‘주막(酒幕)’인가요.

“옛 주막에서는 양반부터 중인들까지 한방에서 잤다고 해요. 어울림의 공간이었죠. 영국의 ‘펍(pub)’도 있고, 일본의 ‘이자카야(居酒屋)’도 있는데, 우리는 주막이 있죠. 우리 음식과 술, 그리고 만남의 방법을 담는 그릇의 이름으로 적합하다고 봅니다.”

과천도가에서 빚어내는 막걸리들. 서형원 대표 제공

- 어떤 술과 음식을 팔고 있나요.

“막걸리 포함 우리 술 140가지를 팔아요. 시중의 막걸리 70%가 수입쌀로 만든 건데, 저희는 수입쌀 막걸리는 팔지 않아요. 음식은 생굴탕, 홍어회, 녹두전, 문어숙회 등 우리가 늘 먹어온 음식인데, 그걸 우리 재료로 만들어 이 음식이 원래 이런 거였다는 걸 보여주려 합니다. 홍성 친환경 돼지고기, 서귀포 고등어를 쓰는 식입니다. 멍게라면의 생면 재료, 식용유 정도를 제외하면 양념부터 채소, 고기까지 모두 우리 재료를 씁니다.”

건강한 노동으로 유지되는 자영업 모델 만드는 데 매진할 것
어울림 문화 늘면 모두 행복…풀뿌리 정치는 국제 평화와 연결

- 운동의 연장선에 있다는 느낌도 드는데요.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고, 그걸 포장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다고 해도 평생 자연환경, 지역을 소중하게 생각해온 사람으로서 수입 농산물이나 유전자조작식품(GMO), 화학조미료는 쓸 수 없어요. 저부터 그런 걸 먹지 않고요. 막상 해보니 쉽진 않더군요. 농협 마트에 외식업체 대상 식자재 코너가 있는데, 국내산 재료 소스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니까요.”

국세청 전통주 제조면허 통계를 보면 2021년 기준 양조장이 1401개에 달한다. 2020년 이후 전국에 양조장이 매주 하나씩 생겨났다고 할 정도로 우리 술 르네상스다. 서 대표 역시 2021년 양조장 과천도가를 설립했다. 거기서 경기백주(14도), 과천미주(8도), 관악산생막걸리(6도)를 만든다. 모두 경기미로 빚은 술이다. 집에서 막걸리 만들기가 취미이던 별주막 박병선 셰프가 전문가 조언을 받아 개발했다. 옛날엔 양조장 방문자에게만 맛볼 특권을 줬다는 막걸리 원액에 해당하는 경기백주(白酒)에 대해 서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백주라는 이름은 고려 문신으로 ‘국선생전(麴先生傳)’을 쓴 이규보가 한직으로 밀려나 쓴 백주시(白酒詩)에서 따왔어요.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맑은술을 마시다가 끈 떨어져 이제 탁주를 마시고 있구나 한탄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래도 이규보 같은 술꾼이 6도짜리 탁주를 마시진 않았을 테고, 풍부한 맛의 14도짜리는 마시지 않았을까요. 그런 데서 착안했어요. 맛은 기본이고,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면 더 재미있죠. 그런 시도가 이른바 ‘힙하다’는 문화에 통했는지, 1만원 넘는 싸지 않은 가격임에도 잘나가는 편이에요. 젊은층 반응이 특히 좋습니다.”

낮의 주막 공간을 사용하는 여우책방. 서형원 대표 제공

- 그런데 주막 한쪽에 책장이 있네요.

“책방입니다. 주막 공간이 낮에는 비어 있죠. 이 지역에서 여성들 중심으로 책방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저도 8명의 조합원 중 한 명입니다. ‘여성들의 우정’을 뜻하는 여우책방 이름처럼 주로 여성과 환경, 에코페미니즘 책이 많아요. 이 공간에서 매주 10개 정도 독서모임이 열려요.”

- 책과 막걸리의 공존, 특이하네요.

“오후 4시를 기점으로 책방에서 주막으로 바뀌는데요. 때론 그 경계가 흐릿해질 때가 있어요. 아무래도 인문학 책 읽고 토론하다보면 좀 예민해지기 쉬운데, 막걸리 한잔하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죠. ‘책막’이라고, 책 읽다가 막걸리 마시는 문화라고 들어보셨나요(웃음).”

이 대목에서 그는 막걸리 철학을 얘기했다. 막걸리는 놀이든 일이든 ‘끝내는 술’이 아니라 ‘이어가는 술’이라는 게 요지였다.

“소주는 개발독재 시절 노동자들이 일 마치고 빨리 자야 하는데 힘드니까 마시고 끝내는 술이었어요. 그런데 예부터 시골에서 막걸리는 일하다가도 먹고, 배 채우고 다시 일하고, 놀다가 마시고 기운 내서 다시 놀게 하는 술이죠. 막걸리는 장벽을 낮추고 경계를 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시의원·녹색당 활동으로 달려오다 과천시장 낙선 후 인생 쉼표
다시 정치할 생각 없어…녹색당, 제도권 정치 도전해 뿌리내리길

광화문에 출퇴근한 환경운동연합 상근자였던 그는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한 시민·환경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이 지역에 파견되며 과천과 인연을 맺었다. 대도시 출신인 그에게 인구 7만 소도시의 여유로운 환경은 별천지 같았다. 결혼하며 이곳에 뿌리내렸다. 시의원, 녹색당 조직 활동으로 쉼 없이 달렸던 그는 과천시장 선거 낙선으로 인생의 쉼표를 찍었다.

“다들 될 걸로 생각하고 한 선거였는데, 제 부족함 때문이죠. 선거에 떨어지고 활동을 계속할까 고민하다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애매한 위치에 남아 있어봐야 경험 많은 사람이 자꾸 이래라저래라 하게 될 것 같고, 비켜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지금도 녹색당원이지만, 당무에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2020년 혁신위원을 한 것은 녹색당이 정말 위기였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잠시 역할을 한 거였고요.”

녹색당은 그가 청춘을 바쳐 만든 결과물이다. 2000년대 초부터 녹색정치준비모임, 초록정치연대 등을 거치며 선거 때마다 녹색의 가치를 반영하고자 했지만 전국 정당 창당은 난망해 보였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동력이 생겼고, 고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하승수 변호사 등과 함께 창당을 주도했다. 그로부터 11년. 여전히 전국에 수천명 당원이 있지만, 선출직이 한 명도 없다.

“녹색당에 기대를 거는 한 시민으로서 녹색당이 과감하게 현실정치, 선거에 도전해 때론 지고, 때론 이기면서 정당체제에 뿌리내리길 바랍니다. 지금 녹색당은 시민단체 성격이 강한 게 사실이죠. 의제를 설정하고 압력을 조직하는 것은 시민단체가 하는 일이고, 그걸로 부족해서 정당을 만든 거니까 제도권 정치에 과감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축구팀을 만들었는데 자꾸 연습만 하면 안 되죠. 시합에 안 나가는 팀을 누가 응원하겠어요.”

- 녹색당에 내부 갈등이 많았죠.

“녹색당에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 많다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가 너무 소중해요. 그러다보니 조금만 다르면 상처를 쉽게 받는 편이고요. 물론 내부 차이에 관한 논쟁이 의미 있고, 성폭력 같은 불의에는 단호하게 대응해야죠. 그와 동시에 정치라는 걸 싸워서 이기기 위한 도구로 본다면 내부 정체성을 다듬는 데 쏟는 에너지 이상을 바깥을 향해 싸우는 데 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료들에게 좀 더 너그럽고, 때론 타협도 해야 한다고 봅니다.”

- 녹색당이 지방의회 다수당이 된 영국 브라이턴앤드호브에 가보셨죠.

“브라이턴앤드호브는 과천보다 인구가 3~4배 많지만 인구 대비 녹색당원 비율이나 진보적 토양이 비슷합니다. 우리보다 이른 1990년 녹색당 이름으로 선거에 처음 도전해 약 20년 만에 시의회 다수당이 됐어요. 어떤 점에선 거기가 더 치열한 것 같아요. 미술사학자, 교사 등 다들 직업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일을 하면서 정치에 참여해요. 우리는 전업 정치인들이 선거를 치를 때 시민들을 동원하는데, 정작 시민들은 정치 현장에서 더 소외됩니다. 반면에 거기는 전업 정치인이 아닌 사람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정말 치열하게 싸웁니다. 시민들이 권력을 놓고 그야말로 싸우는 건데, 이걸 점잖게 표현할 수가 없어요. 뭔가 직접민주주의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 무엇 때문에 차이가 생겼을까요.

“우리는 노동시간이 너무 깁니다. 시민의 정치 참여를 막는 여러 장벽이 있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는 노동하고 애 키우고 나면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는 모양만 취했을 뿐, 실제론 시간과 돈 있고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정치가 되기 쉽죠. 시민들은 명망가를 통해 자신의 원념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나의 원망, 분노, 승부욕, 출세욕을 정치인에 투사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조금만 나와 의견이 다르면 죽일 놈 되기 십상이죠. 정치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아무리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결국 ‘우리’가 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우리’가 책임지는 건데, 특정 정치인에게 맡겨놓다보니 더 극단적으로 되고 숙고하기도 어려워집니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싸워주길 바라지 말고, 직접 자기 목숨과 명예를 걸고 해야 사람들이 조심하고, 책임감도 더 강화되지 않을까 싶어요.”

‘다시 정치할 생각은 없느냐’는 물음에 서 대표는 딱 잘라 “없다”고 했다. 잠시 침묵한 뒤 “오래 했잖아요”라고 덧붙였다. 인생 2막은 “건강한 노동으로 유지되는 자영업 모델”을 만드는 데 매진하려는 것 같았다.

“자영업자가 돼보니 모든 게 너무 박합니다. 사업 구조가 모두 가성비 위주로 돼 있습니다. 특히 사람 쓰는 값이 너무 박해 마음이 불편합니다. 국내 자영업자들은 대부분 부부가 알바 한 명 써서 하루도 안 쉬고 일하고 인건비를 아껴서 아파트 한 채 사는데, 결국엔 누구 한 명이 심각하게 아프고 마는 구조입니다. 그나마 저희 가게는 부가가치를 좀 올리는 편이고 인건비 비중이 높은 편입니다. 별주막 4명, 과천도가 4명, 저까지 9명이 월급을 받아가는데 직원들 월급을 줄 정도로 손님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어주시니 다행입니다.”

- 지속 가능한 경로에 올라선 건가요.

“막상 코로나 2년을 겪으니 지속 가능하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코로나 기간엔 건물주에게 월세를 깎아달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적자를 보며 버텼습니다. 그럼에도 자금이 모래 빠져나가듯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도가에 투자도 했고요. 작년 4월부터 코로나 영향에서 벗어나며 영업이익을 내고 있습니다. 천재지변만 없으면 이 가게는 잘 갈 겁니다. 다만 천재지변이란 게 생각보다 잘 일어나는 게 문제이지만요.”

별주막과 별도의 장소에 있는 양조장 과천도가 벽면에 새겨진 창업자들의 이름. 서형원 대표 제공

- 운동과 정치를 오래 하며 밴 습성이 사업에 반영되는 측면도 있을 텐데요.

“친환경 재료를 쓰는 것뿐 아니라 건강한 노동으로 유지되는 자영업 모델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내 귀한 시간을 모두 임금노동에 바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주 4일 일하고, 저는 5일 일합니다. ‘자영업은 몸을 갈아넣는 일’ ‘가성비 갑’이라는 강력한 편견에 도전하려 합니다. 몇년 내 광화문에 분점을 내고 주막을 세계에 알릴 겁니다.”

- 그런데 굳이 세계화를 해야 할까요.

“세계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를 즐기는 데 기여하는 건 좋은 일이죠. ‘국뽕’적인 게 전혀 없다고 할 순 없겠죠. 하지만 식민지배, 전쟁 참화를 겪고 지난 100년여 동안 사람들뿐만 아니라 먹을거리, 술, 자연도 모두 박살나며 함께 고생했는데 이런 게 되살아나면 우리도 행복해지고, 세상 사람들도 더 행복해지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고 이걸로 세계를 지배하자는 건 아니니까요. ‘우리 축구팀 좀 멋지지’ 정도 자부심은 가져도 되는 것 아닌가요.”

별주막 천장엔 식재료, 술의 원산지를 표시하는 지점들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다. 서 대표는 “이 지역들이 철도로 연결되면 좋겠다”고 했다. “풀뿌리 정치와 국제 평화는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막걸리’라는 명사는 ‘한잔 먹고 풀자’라는 술어와 잘 호응한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마을마다 있었던 주막은 지역, 신분의 구별 없이 술과 음식을 향유하던 공간이었다. 그런 어울림의 문화가 되살아나고 늘어나는 것. 이 사람이 인생 1막에서 이루려 했던 목표와 멀리 있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손제민 논설위원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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