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나라'에서 맛 본 '신의 음료'..원초적이고 짜릿한 향연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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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제우스(Zeus)와 그 일가들은 아직도 올림푸스 산에 살고 있을까. 신과 인간이 얽혀 사는 나라이자, 서양 문명의 기원이 된 그리스를 지난해 말 훌쩍 다녀왔습니다. 신들과 인간의 발자취가 섞인 곳을 따라, 고대 역사가 얽힌 사람의 땅을 찾아 '디오니소스(Dionysos)의 선물'을 경험해봤습니다. 제가 찾은 곳은 아테네가 위치한 그 일대 '아티카(Attica)'입니다. 라틴어로는 '아티키(Attiki)'라고도 불리며 서쪽으로 코린토스 만, 남서쪽으로 사로니코스 만, 남쪽으로 에보이코스 만으로 둘러싸인 반도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그리스의 심장 '아테네(Athens)'가 있습니다.
아티카 와인은 4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의 아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를 여행하던 중 아티카에 들렀고 아테네의 이카리오스가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는 그 보답으로 이카리오스에게 포도 나무를 선물하고 와인을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고 합니다.
■바람둥이 제우스를 닮은 '사바티아노'..성깔있는 헤라 같은 '아시리티코'..프리네가 연상되는 '말라구지아'
아티카는 주로 토착 포도 품종을 재배하는데 현재 300여 종에 달합니다. 그 수많은 토착 품종 중 아티카를 상징하는 포도는 사바티아노(Savvatiano)입니다. 올림푸스의 신 '제우스'가 신계와 인간계를 오가며 늘 말썽을 피우지만 언제나 존재감을 잃지않는 것처럼 사바티아노는 아티카를 지배하는 이 지역 '토착품종의 왕'입니다. 아티카 포도 경작지 6200ha 중 89%에 달하는 5500ha가 사바티아노 입니다. 많이 재배된다고 해서 만만히 볼 포도가 아닙니다. 사바티아노는 더위에 워낙 강해 아티카 모든 지역에서 잘 자라는데다 이 지역 떼루아를 가장 직선적으로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풍미는 서늘한 청사과부터 열대지방 과일 향까지 굉장히 다양하게 나오며, 때론 흰 꽃 향을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산도가 적당하고 질감은 미디엄 정도며 숙성 잠재력이 아주 좋습니다. 숙성된 사바티아노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10년 정도 지나면 잘 구워진 견과류와 꿀 향 등의 풍미가 아주 좋은 와인이 됩니다.
아티카의 매력적인 포도는 또 있습니다. 토착 품종인 아시리티코(Assyrtiko)입니다. 혀를 잡아흔드는 짜릿한 산도와 독특한 풍미가 일품인 포도로 마치 신화 속 '헤라(Hera)'와 닮아 있습니다. 제우스가 다른 여신이나 인간과 바람을 피우면 반드시 찾아가 복수를 하는 헤라처럼 아시리티코 포도로 빚은 와인은 섬세하고 매혹적이지만 아주 카랑카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핵과류와 열대과일 풍미가 어우러진데다 바디감도 탄탄하고 미네랄리티도 굉장히 고급스럽습니다. 특히 산도가 좋아 입속에 들어오자마자 치솟는 산도는 굉장히 자극적입니다. 잘 다스리면 고급스럽고 황홀한 맛을 내보이지만 자칫 서툴게 다루면 대단한 성깔을 드러냅니다. 아티카의 아시리티코도 너무 좋지만 산토리니 섬에서 나는 포도를 가장 높게 칩니다.
말라구지아(Malagousia)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런데 신화 속 아프로디테가 아니라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아프로디테'로 불리던 기원전 4세기 경 프리네(Phryne)입니다. 프리네는 아테네 북쪽 보이오티아(Boeotia) 출신으로 빼어난 미모에 정치, 문화, 예술 등 교양을 갖춰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진짜 여신'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특히, 질시와 모함으로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쓴 채 법정에 섰지만 발가벗은 몸으로 배심원들로부터 "아름다운 것은 위대하다. 그러므로 모두 무죄다"라는 판결을 받아낸 것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말라구지아는 프리네가 연상될 정도로 그 풍미와 맛이 치명적으로 화려하고 우아합니다. 복숭아, 살구 등 옅은 핵과일 풍미가 잔잔하게 흐르는 가운데 폭발하는 열대과일 풍미, 열대지방의 진한 흰꽃 향까지 정말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바디감이 묵직하지만 잘 만들면 산도까지 좋아 쾌활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아티카는 이외에도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토착 품종 로디티스(Roditis)가 있습니다. 그리스 전체에서 두 번째로 많이 재배되는 품종이지만 이 곳에서는 재배 면적이 2% 내외입니다. 레드 와인 품종으로는 토착 품종인 아기오르기티코(Agiorgitiko)와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메를로(Merlot), 시라(Syrah) 등이 있지만 존재감이 크지는 않습니다.
■서늘하고 미네랄리티가 좋은 PGI 아티키..생산자 개성이 뚜렷한 PGI 마르코푸로
아티카는 연중 일조량이 풍부하고 강수량이 적은 곳입니다. 기후적으로는 겨울은 온화하고 여름에는 강렬한 태양이 내리쬡니다. 하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열기를 식혀줘 포도 생육에 아주 좋은 곳으로 꼽힙니다. 아티카 지역의 지리적 표시는 'PGI 아티키(PGI Attiki)', 'PGI 마르코푸로(PGI Markopoulo)', 'PGI 슬로프 오브 키떼로나스(PGI Slopes Kithairnas)', PGI 레치나 오브 아티키(PGI Retsina of Attiki) 등이 있습니다. PGI는 '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s'을 뜻하는데 PDO(Protected Designations of Origin)의 아래 개념입니다.
아티카 와인을 경험하기 위해 아테네에서 동북쪽 산악지역으로 차를 달려 'PGI 아티키'로 갔습니다. 아테네와 마라톤 사이에 있는 PGI 아티키 지역은 유서깊은 올드 바인이 유명한 곳으로 이곳에서는 부시 바인 형태로 포도를 키웁니다. 마라톤은 '기적의 전투'가 벌어졌던 그 마라톤 지역입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2차 전쟁 때 아테네 군 9000명이 페르시아 최정예군 2만5000명을 물리친 마라톤 평원이 산자락 너머로 펼쳐져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모든 남자들을 총 동원해 군대를 꾸리고 마라톤 평원에 상륙하는 페르시아 군을 맞아 전투를 벌입니다. 놀랍게도 아테네 군은 페르시아 군을 단번에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아테네 군이 전열을 정비하자 마자 곧장 산을 넘어 아테네까지 42km를 쉬지않고 내달립니다. 또 다른 페르시아 군이 배를 타고 아테네로 직접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옷까지 갖춰 입고 중무장을 한 아테네 병사들이 그 험하고 먼 거리를 쉬지않고 달려 단 하루만에 도착합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들을 내달리게 만든 것은 아테네에 무방비 상태로 놓인 가족들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그리스 군은 아테네로 향하기 전 전령을 먼저 보냅니다. 그 전령은 "우리가 가고 있으니 걱정말고 있어라"라는 내용을 전달하고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맙니다. 마라톤의 유래가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PGI 아티키는 바로 그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표 품종 사바티아노와 아시리티코, 말라구지아 등으로 만든 29종의 와인을 차례로 시음해봤습니다. 산악지대의 와인답게 과실 아로마는 드라이하고 산도가 굉장히 훌륭했습니다. 짜릿한 산도로 유명한 아시리티코는 물론이고 사바티아노, 말라구지아 와인들도 발랄합니다. 더불어 미네랄리티도 좋습니다.
시음에 앞서 도멘 코스타 라자리디 S.A.(Domaine Costa Lazaridi S.A.)라는 와인 박물관을 들렀는데 아테네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꼭 들러볼 만 합니다. 그리스 와인에 대한 역사와 그 시대적 흔적들이 잘 정리돼 있는 곳입니다.
이튿날엔 'PGI 마르코푸로'를 찾았습니다. 아테네에서 동남쪽 해안에 자리잡은 곳으로 PGI 아티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고도가 350m에 달하는 언덕이 많은 지대인데다 해안가와 가까워 훌륭한 와인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이 지역 생산자들이 출품한 40종의 와인을 차례로 맛봤습니다. 아티키 와인이 서늘한 느낌 위주라면 이 지역 와인은 개성이 좀 더 여러 갈래로 나뉘어집니다. 서늘한 느낌을 주는 와인도 있지만 때론 아주 더운 과일 향이 확 느껴질 정도로 대비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포도밭이 위치한 떼루아에 따라, 생산자에 따라 와인은 분명한 자기 색깔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만의 개성을 보여주는 레치나 와인도 꼭 경험할만 합니다. 과거 와인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천연보존제인 송진으로 항아리를 밀봉하면서 탄생한 와인입니다. 이 과정에서 와인에 송진 향이 짙게 스며들면서 색다른 맛을 경험한 그리스인들은 레치나 와인을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와인에 일정량의 송진을 넣어 그 맛을 내고 있습니다. 사바티아노와 로티스 품종을 이용해 만듭니다. 이 와인은 PGI 레치나 오브 아티키로 생산자 보호를 받고 있는 와인입니다.
■PGI 슬로프 오브 키떼로나스..2500년 전 역사가 곳곳에 녹아있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아테네 법정. 신성모독죄로 기소돼 재판정에 선 프리네에게 변호사가 다가가더니 갑자기 동상 제막식을 하듯 그녀의 가운을 확 걷어냅니다. 순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프리네의 눈부신 알몸이 드러나자 배심원들이 여기저기서 탄성을 내뱉습니다. 잠깐 동안의 토론이 있은 후, 배심원들은 프리네의 신성모독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배심원들은 판결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신성하다. 저 여인 앞에서는 한낱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만들어 낸 법이나 기준은 효력을 잃는다. 그녀는 무죄다"였습니다. 쉽게 말해 "이쁘니까 모두 무죄"라는 것이었죠. 훗날 이 장면을 그린 걸작이 '배심원 앞의 프리네(장 레옹 제롬, 1861년 80*128, 독일함부르크미술관)'입니다. 당시 프리네의 연인이자 유명한 조각가인 프락치텔레스는 그녀를 모델로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프락치텔레스, 기원전 340~330년)'를 남겼습니다. 프락치텔레스는 아프로디테의 옷을 최초로 벗긴 사람이자, 여성의 가장 은밀한 둔덕의 곡선 '입실론(λ)'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조각가였습니다.
프리네에 대해 이처럼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아티카 와인의 또다른 산지 PGI 슬로프 오브 키떼로나스 인근이 프리네의 발자취가 곳곳에 닿아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에서 서북쪽 엘레우시나 만을 향해 차를 달립니다. 엘레우시나 만 아래쪽 살라미나 섬과 그리스 본토 사이 좁은 해협이 그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기원전 480년 아테네 해군은 3배가 넘는 페르시아의 군선 1200척을 맞아 400여척을 이곳에서 몰살시키고 패망 직전, 진짜 기적처럼 살아납니다. 엘리우시스 만 바다에는 엘레우시스(Eleusis)라는 고대 도시가 있습니다. 지금은 폐허처럼 버려져 있지만 기원전 4세기 경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종교행사가 벌어지던 곳입니다. 포세이돈 축제가 벌어지는 어느 날 프리네가 발가벗은 몸으로 머리를 늘어뜨린 채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 비너스같은 모습의 포즈를 취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같은 행동으로 비너스를 모독했다는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하게 됩니다.
엘리우시스를 지나 북으로 차를 타고 키떼로나스 산을 구불구불 올라 내려오면 해발 500m 쯤에 넓은 구릉지대가 펼쳐집니다. 또 다른 역사적 도시 테베와 인접한 PGI 슬로프 오브 키떼로나스 지역입니다. 아테네와 전혀 다른 검은 토양의 포도밭이 광할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테베는 페르시아를 물리친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이어 마지막으로 그리스 패권을 차지하게 되는 도시국가입니다.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마케도니아 왕국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2세가 어린시절부터 이 곳에서 볼모로 잡혀있던 곳입니다. 테베는 아테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전멸시킨 페르시아 해군으로 참전한 페니키아인들이 기원전 800년 경에 세운 나라입니다. 결국 테베는 페르시아, 더 나아가 자신들 조상의 복수를 한 셈입니다.
테베와 맞붙어 있는 슬로프 오프 키떼로나스 와인은 또 어떤 모습일까. 앞서 찾아간 아티키와 마르코푸로의 해양성 기후와 달리 이 곳은 대륙성 기후를 띱니다. 와인 또한 전혀 다릅니다. 해발 고도가 높고 밤낮 기온차가 커 사바티아노, 아시리티코, 말라구지아 등도 산도가 높고 미네랄리티가 굉장히 좋습니다. 과실 아로마도 차가운 느낌을 줍니다.
레드 와인도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시라 등 국제품종을 재배하는데 품질이 좋습니다. PGI 슬로프 오브 키떼로나스는 아직 유명세를 덜 타고 있지만 잠재력이 아주 좋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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