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43년 만의 참배
5·18 이듬해 입학한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매주 한차례 성경수업을 담당하는 전도사 선생님은 어깨가 떡 벌어진 특전사 출신이었다. 5월 어느날 수업 도중 불쑥 광주 이야기를 꺼냈다. 5·18 당시 진압군으로 광주에서 겪은 경험담이었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쩔 수 없이 총을 쏴야 했다”며 미간을 일그러뜨리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또렷하다.
2019년 출범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광주 현장에 있던 장병들에게 주목했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2만351명 중 1800여명을 접촉해 200명으로부터 증언을 이끌어냈다. 가해자를 만나 증언을 이끌어내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할 말 없다’는 한마디로 통화가 끊기거나 “내 주소를 어떻게 알고 왔느냐”며 문전박대를 당하는 건 예사였다. 인사차 건넨 명함이 눈앞에서 구겨지기도, 개에게 물리기도 했다. 그래도 돌아서며 문틈에 명함을 끼워놓고 연락을 기다렸다.
발품을 팔아 일일이 접촉하는 조사팀의 노력이 통했다. 군인들은 40년간 굳게 닫았던 입을 열고 ‘그날’을 말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사체처리팀을 운용해 최대 50여구의 시신을 암매장했고, 트럭에 실려 끌려가던 민간인 12명이 적재함에서 질식사했다는 증언 등이 나왔다.
지난 40여년은 군인들에게도 인고의 세월이었다. 죄책감과 우울증, 대인기피, 정신질환 등 트라우마를 겪었고,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도 있었다. 조사팀이 만난 가족들은 그들이 ‘술에 찌들어 살거나 간신히 종교의 힘으로 버틴다’고 귀띔했다.
침묵을 깨자 유족들 앞에 나설 용기를 얻었다. 광주 노대남제 저수지에서 사살된 박병현씨 유족에게 가해 계엄군이 지난해 3월16일 엎드려 눈물로 사죄했다. 그들도 ‘부당한 명령에 따라야 했던 피해자’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화해가 싹텄다.
지난 11일 특전사동지회 광주전남지부 관계자들이 5·18단체 사무실을 공식 방문해 귤 20상자를 전달했다. 17일에는 5·18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공로회)가 특전사동지회와 함께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당시 숨진 특전사와 경찰관 묘역을 43년 만에 참배한 것이다. 5·18역사의 한 획을 그은 장면이다. 진실이 밝혀지고, 속죄와 용서로 이어지는 진실·화해의 여정이 비로소 시작됐다.
서의동 논설위원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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