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서 건진 진솔한 언어들… “자유로운 시인 되고싶어”

김용출 2023. 1. 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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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새 시집 ‘갈수록 자연이…’
시력 30년… 5년 만에 다섯 번째 시집
사람들의 위선부터 운명의 자각까지
시인의 체험·사유 57편에 오롯이 담겨
“문학관·좋아하는 작가 등 시집 반영
사라져가는 동식물에 대한 詩 쓰고파
앞으로의 30년, 자신에게 충실했으면”
붉디붉은 너도 내 신세 같구나. 7, 8년 전쯤, 부산에 갔다. 해운대가 보이는 동백섬에는 동백꽃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붉은 꽃잎, 길고 가지런한 꽃술, 단정한 꽃받침…. 평소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예쁜 줄 몰랐다. 떨어진 동백꽃에서 애달픈 자신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했다. 슬펐다. 꽃이 질 때는 왜 이리 슬플까.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는 시상이 먼저 떠올랐다.
김상미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시들에는 개인적 체험과 사유가 솔직하게 담겨져 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아니 에르노의 향기가 난다. 이재문 기자
다시 어느 봄날, 우연히 꽃이 피는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됐다. 비록 서서히 피었지만, 꽃이 피는 게 느껴졌다. 황홀했다. 인간에게서 볼 수 없는 어떤 완벽함. 신의 경지였다. 개화의 황홀과 낙화의 비애가 어우러지자 한 편의 시가 피어올랐다.
“모든 꽃은/ 피어날 때 신을 닮고/ 지려 할 땐 인간을 닮는다// 그 때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미스터리’ 전문)

개인적 체험을 솔직하게, 그러면서도 문학적 언어로 승화시켜온 김상미 시인이 지난해 연말 신작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문학동네·사진)를 들고 돌아왔다. 전작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가 나온 이후 5년 만의 신작으로,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시집에는 ‘미스터리’를 비롯해 개인의 체험과 사유가 솔직하게 담긴 시 57편이 담겨 있다. “그와 내가 닮은 점은 부서지고 가라앉으면서도 서로를 열렬히 원한다는 점”(‘난파선’)이라는 시인의 성찰부터, “부러운 척, 탐나는 척 어머, 어머, 감탄사를 남발하며 아주 모던하고 담백한 척 건강미를 뽐내는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척, 즐거운 척, 황송한 척”(‘포커 치는 개들’)하는 사람들의 위선과, “사악한 영혼, 싸구려 환상들이 푸른 나무들을 좀먹고 분노한 바다들이 다정한 배들을 삼키고 있”(‘거기, 누가 있나요?’)는 세태에 대한 분노와, 다시 “내 팔자 또한 더럽게 춥고, 어둡고, 외롭고, 고달파도, 그들과 함께 계속 문학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뜨거운 피가 솟구친다”(‘문학이라는 팔자’)는 운명의 자각까지 담긴.

시력이 30년을 넘었지만 다섯 권의 시집만을 펴낸 김상미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도대체 무엇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일까. 김 시인을 지난 13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우리는 부러운 척, 탐나는 척 어머, 어머, 감탄사를 남발하며 아주 모던하고 담백한 척 건강미를 뽐내는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척, 즐거운 척, 황송한 척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제각기 준비해간 선물 보따리를 풀며 마치 그들의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인 척 환하게, 환하게 웃다가,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걸려 있는 C. M. 쿨리지의 그림 「포커 치는 개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우리도 저들처럼 신나게 포커나 한판 칠까? 그러자 쪼르르 카드를 가지러 가는 주인 부부. 하긴 오늘 우리가 척, 척, 척하며 그들에게 흔들어댄 꼬리만 해도 얼마냐. 졸지에 인간 아닌 척 신나게 포커 치는 개가 된다 한들….”(‘포커 치는 개들’ 부문)
―집들이를 통해 한국인의 세태나 위선을 서늘하게 묘파하는 것 같은데.

“오래전 집을 새로 마련한 친구에게 초대를 받은 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그 집에 갔다 온 적이 있었다. 친구들을 폄하하려 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재미있게 쓰기 위해서 쿨리지 그림을 넣어서 당시 모습을 극화해 썼을 뿐이다.”

개인적 경험이나 사유를 담은 그의 시들은 솔직하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의 향기가 난다. “짝짓기는 외로운 사냥개, 표적이 잡히면 엄청난 즐거움에 울고 웃는 탐색전,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넋 잃고 빠져드는 함정 속의 함정, 연속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실수 속의 실수, 다시 한번, 또, 또…. 끝없이 펼쳐지는 황홀한 꽃밭 같지만 순식간에 무성한 잡초로 우거지는, 쓰디쓴 환상, 평생 동안 어마어마한 헛된 호기심 속에 탕진한, 짝짓기의 바벨탑”(‘짝짓기의 바벨탑’ 부문)

―연애를 노래한 이 시는 어떻게 나왔는지.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보통 이런 시를 쓴다. 먼저 짝짓기에 관계되는 모든 낱말을 머리에서 끄집어 쭉 쓴 뒤, 이것들을 연결해 시를 만든다. 이렇게 쓴 긴 시들은 리듬이 끊기면 안 되기 때문에 단번에 쓴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연애의 바벨탑이라고 하면 너무 유치해서 짝짓기로 표현했다.”

시인은 힘들 때마다 자신보다 앞서 불행한 삶을 살다간 예술가들의 책을 들여다보곤 했다. 팬데믹이 휩쓸던 절망의 그 시절에도. “문학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더럽게 불운하고, 더럽게 치열하고, 더럽게 품격 있고, 더럽게 자존이 강했던 그들의 팔자. 나 자신이 위로받으러 갔는데, 오히려 내가 감화되어 울고 나오게 되는 그들의 팔자. 그런 팔자임에도 그 지독한 불운과 죽음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들의 문학. 그 시퍼런 도끼날의 세례를 받고 오면, 내 팔자 또한 더럽게 춥고, 어둡고, 외롭고, 고달파도, 그들과 함께 계속 문학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뜨거운 피가 솟구친다.”(‘문학이라는 팔자’ 부문)

―문학이 고통과 희망을 함께 주는 것 같다.

“팬데믹이 휩쓸면서 힘들고 절망적인 상태였다. 조금씩 벌어서 살아왔는데, 수입이 다 끊기고 힘들었다. 절망할 때마다 위로를 받기 위해 랭보를 비롯해 불행하게 살다간 예술가들의 책을 다시 보곤 했다. 이들은 불행하게 살았지만, 문학적으론 대단했다.”

―이번 시집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서울문화재단 지원을 받았기에, 3년 안에 시집을 출간해야 했다. 시집 초고를 보고서 조금 울었다. 의도한 건 아닌데, 힘들 때 쓴 시들도 많은 데다가 이상하게 자서전처럼 딱 묶였더라. 내 이야기들이 많고, 제가 생각하는 문학관이 많이 담겨 있고, 좋아하는 작가들도 많이 나온다.”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상미는 1990년 ‘그녀와 프로이트 요법’ 외 7편의 시를 문예지 ‘작가세계’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그의 나이 만 서른셋. 등단 이후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등을 펴냈다. 박인환문학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고, 독자들에게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나이가 60을 넘으니까 시 쓰는 게 좋더라. 최근 이사 레슈코의 사진집 ‘사로잡는 얼굴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야생동물과 달리 농장 동물들은 늙어서 죽는 동물이 없다고 하더라. 우리를 위해 알을 낳다가 죽기도 하고 고기를 위해 도살된다. 사라져가는 동식물과 사물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 대한 시를 쓰고 싶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시인이 되고 싶다.”

문학소녀와 등단 시인으로 각각 부산과 서울에서 30년씩을 살아온 시인 김상미는 이제 새로운 노년의 30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앞의 두 시기와 달리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고, 그는 소망했다. 아마 그 안에는 있을 것이다. 정독도서관의 동아리 모임도, 시인축구단 ‘글발’도, 특히 아드레날린을 있는 대로 발기시키는, 절망에 눈이 먼 채로 허기지고 굶주린, 죽기 전까지 결코 놔주지 않을 그 놈의 시도.

“그러나… 그럼에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제대로 입히고 먹여줄 게 시밖에 없어/ 뜬구름 잡듯 또다시 펜을 집어 든다// 이 우주에 시 아닌 것 있으면 나와 보라고/ 절망에 눈이 먼 채로 큰소리치며// 돈키호테가 풍차를 들이받듯 용감하게/ 있는 대로 아드레날린을 발기시키며/ 허기지고 굶주린 시 속으로/ 미치고 미치다 꺼꾸러진 희디흰 뼛가루/ 그 위에 던져진 한 떨기 백합처럼/ 결코 나를 놓아주지 않을 시 속으로….”(‘시인 앨범 7’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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